티스토리 툴바


말과 말 사이

2011/09/27 16:35 from 단상
아주 짧고 별 내용 없는 대화에서도 나의 말과 상대의 말 사이, 나의 말과 다음 말 사이의 간극을 우리는 잘 견디지 못한다. 충분히 익지 않은 내용이라도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서둘러 말로 뱉어 둘러쳐버리든지, 정 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어우, 어색한데?', 혹은 '어우 썰렁하다'는 식의 말로 그 간극을 메우려고 한다. 그런데 실은 정말의 대화, 저 사람이 한 말에 대한 정말의 내 정서와 생각의 형성은 내 입이 떨어지기 전(혹은 말을 하는 동안의 미세한 간극 속에서)에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내 말 한마디와 그 다음 말 사이의 간극에서도 그렇다. 이러한 순간을 눙치지 않고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내 생각', '내 마음', 혹은 새로운 생각 같은 것들이 싹틀 수 있다. 설익은 생각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충분히 익히면서 침묵과 간극의 시간을 견디는 것 또한 중요하다.

뭐든 자연스러우려고 애쓰지 말자. 그러는 동안에 나의 생각과 마음이 자연스레 무르익을 기회가 인위적으로 가지쳐짐을 잊지 말자.
저작자 표시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과 말 사이  (0) 2011/09/27
어떤 날  (4) 2011/01/28
맑스의 코뮌, 레닌의 코뮌  (0) 2010/10/30
우리가 만나야 할 레닌  (0) 2010/10/23
오랜만에  (0) 2010/08/10
개념글  (0) 2010/06/03
Posted by 순덕한 호랭이 트랙백 0 : 댓글 0
* 2월 5일 연구공간 L 맑스주의 세미나 발제문



엥겔스,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발제문


1. 유물론적 역사연구


엥겔스에 따르면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은 ‘자신의 유물론적 역사 연구의 성과들과 결부하여 모건의 연구 결과를 서술하고 그 결과들이 가지는 전체적인 의미를 밝히고자 했던’ 맑스의 유지를 집행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서술되고 가정되는 역사는 다음과 같은 유물론적 관점에 입각하고 있다. 즉 ‘직접적 생활[삶]의 생산과 재생산이 종국적으로 역사를 규정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요인 자체는 생활수단들의 생산과 인간 자체의 생산이라는 두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전제를 받아들이면 역사의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사회적 제도는 두 종류의 생산에 의해 규정된다. 한편으로 노동의 발전단계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


이렇듯 유물론적 역사연구의 중요한 한 축인 가족사 연구는 1877년 모건의 저작 『고대 사회』에서 제시된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들로 인해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 이전의 가설들로는 해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친족형태들의 기원을 규명하여 처음으로 가족사 전체의 윤곽을 그릴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모건의 연구가 이전까지의 신화적, 관념적 형태의 가족사 연구 방법 및 관점을 철저히 분쇄하고 유물론적 역사연구의 기틀을 가족사 분야에 확립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모건의 연구에 기반한 원시사를 보기에 앞서, 제4판 서문을 통해 가족사 분야의 유물론적 역사연구의 정립과정을 먼저 살펴보자.


2. 가족사 연구의 발전 과정


1860년대 초까지 가족사는 완전히 모세5경의 영향 하에 있었다. 사람들은 경전에 묘사된 가부장제적 가족형태를 가장 오래된 가족 형태로 간주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당대의 부르주아적 가족과 동일시하였다. 물론 사람들은 고대사의 몇몇 민족들과 현존하는 몇몇 야만인들이 모계혈통을 따른다든가, 오늘날에도 일정한 규모의 집단 내부에서의 결혼을 금지하는 민족들이 많다는 등의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사례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가족사 연구는 바호펜의 『모권』이 출간된 1861년부터 시작되었다. 바호펜은 이 책에서 ① 인간들은 처음에 그가 ‘난교’라고 부적절하게 칭한 무제한적 성교생활을 했고, ② 이러한 관계에서 혈통은 여계에 따라서만 따질 수 있었으며, ③ 그 결과 여성은 높은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완전한 여성 지배에 이르렀고, ④ 단혼으로의 이행은 태고의 종교적 계율의 침해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여자는 일정 기간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맡김으로써 이를 보상[속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주장했다. 바호펜은 ‘난교’에서 일부일처제로, 모권에서 부권으로의 발전을 종교적 표상의 발전 결과로 설명함으로써 신비주의적 견해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난교’의 흔적을 고대 고전 문헌에서 허다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 이 관습은 이미 소멸했지만 여자가 일정 기간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허락하는 것을 대가로 단혼의 권리를 사야 한다는 형태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 따라서 혈통은 최초에는 오직 여계에 따라서만 따질 수 있었다는 것, 단혼의 시기에도 오랫동안 여계만이 중요시되었다는 것, 어머니의 이러한 시초의 지위는 여성 일반에 대하여 그 후에는 그들이 다시는 획득하지 못한 그러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였다는 점을 논증했다.


‘천재적 신비주의자’ 바호펜의 후계자는 무미건조한 법률가 J. F. 맥레넌이었다. 맥레넌은 고대와 현대의 여러 미개 민족과 야만 민족들 사이에서 약탈혼의 형태를 발견하는데, 이러한 혼인 형태의 형성원인을 족외혼 집단과 족내혼 집단 사이의 엄격한 대립을 설정함으로써 해결한다. 즉 족외혼 부족은 다른 부족으로부터만 아내를 얻을 수 있었고 야만 시기에 상응하는 부족 사이의 부단한 전쟁으로 인해 약탈에 의해서만 아내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이러한 대립은 실상 그 자신의 표상 가운데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멕레넌이 몰랐을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을 자신의 전체 이론의 기초로 삼고 있다고 비판한다. 맥레넌의 이같은 이론이 영국에서 확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일체의 자유로운 고찰, 따라서 일체의 결정적인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족외혼이라 불리는 것이 도처에 널리 보급되어 있다는 것, 모권적 혈통제도를 본원적인 것으로 인정한 점 등의 기여를 하였지만 그의 이론의 법률가적 편협함은 이후 가족사 연구에 엄청난 해를 끼쳤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단혼으로 짜여진 맥레넌의 말쑥한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이 속속 출현하였다. 일부 민족들 사이에 일련의 남자들이 일련의 여자들을 공유하는 결혼형태가 있었다는 증거들이 나타난 것이다. 러복은 이러한 군혼communal marriage을 역사적 사실로서 승인하였다. 그 직후인 1871년 모건은 아메리카 의 이로쿼이 족에게 특유한 친족체계에 대한 연구 결과를 가지고 등장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었다. ① 아메리카 인디언의 친족체계는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의 많은 부족들에게서도 변용된 형태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 ② 이 친족체계가 하와이와 기타 오스트레일리아의 섬들에서 사멸해가고 있는 군혼의 한 형태를 통해 완벽하게 섦여된다는 것, ③ 이 섬들에는 이 결혼 형태와 나란히, 지금은 사멸한 한층 원시족인 군혼형태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친족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 모건의 연구는 친족 체계에서 출발하여 그것에 조응하는 가족 형태를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연구의 길을 열었으며 훨씬 더 과거까지 인류의 선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맥레넌은 모건이 말하는 친족체계 ― 이로쿼이 족에게 통용되는 결혼제도(단혼)에서 실제로 도출되는 촌수와 모순되는 친족체계. 즉 자신의 자
녀들 뿐 아니라 동성 형제/자매의 자녀들을 자신의 아들, 딸이라고 부르는 한편 이성 형제/자매의 자녀들은 조카, 조카딸이라고 부르는 친족체계 ― 가 사회적 예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지만, 모건은 1877년 자신의 저작에서 맥레넌 이론의 토대, 즉 족내혼 집단 대 족외혼 집단의 대립을 무너뜨림으로써 그의 인위적 가설의 잔재까지 쓸어버린다. 족외혼과 족내혼은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군혼이 아직 지배하던 때에 부족은 어머니 편의 혈족에 따른 몇 개의 집단들, 즉 씨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씨족 내부에서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한 씨족의 남자들은 아내를 부족 내부에서 구할 수 없었고 반드시 자신의 씨족 외부에서 구해야 했다. 그러므로 씨족은 엄격히 족외혼을 하였지만, 이 씨족 전체를 포괄하는 부족은 족내혼을 하였다. 모건은 나아가 모권에 따라 조직된 씨족 내에서 부권에 따라 조직되는 이후의 씨족이 발전해나오는 원형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당시까지 모든 역사 서술가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그리스와 로마의 씨족들은, 이제 인디언 씨족들을 설명되었으며 처음으로 가족사 전체의, 원시사 전체의 윤곽을 그릴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3. 선사 시대의 문화 단계들


엥겔스는 모건의 시도를 따라 인류의 선사시대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각각의 시기는 생활수단생산의 진보에 따라 낮은 단계, 중간 단계, 높은 단계로 구분된다. 이는 노동수단 및 가족의 생산과 재생산이 역사를 결정한다는 유물론적 역사관에 부합한다.


① 야만 - 기성의 자연 산물을 획득하는 시기. 인간의 가공물이 자연 산물 획득을 위한 보조 도구로 사용되는 시기.


낮은 단계
: 열대, 아열대의 삼림에 거주. 열매, 견과 등을 채집. 분절 언어의 발생. 이러한 원시 상태의 실재를 증명할 만한 직접적 증거는 없지만 인간이 동물계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이러한 과도적 상태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음.


중간 단계
: 불을 사용해 어류를 식량으로. 기후나 장소에 상관 없이 거주 가능. 초기 석기 시대의 조잡한 석기들. 최초의 무기 사용. 수렵+채집, 식인.


높은 단계
: 활과 화살의 발명. 수렵이 정상적 노동부문의 하나가 됨. 도기 제조법은 아직.


② 미개 - 목축과 경작을 도입하는 시기. 인간활동으로 자연물 생산을 증대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시기. 이 단계부터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의
자연적 조건의 차이(길들일 수 있는 동물 및 재배가능한 작물의 종류와 수)가 의미를 가지게 됨.


낮은 단계
: 도기제조


중간 단계
: 가축을 길들이기 시작, 큰 가축 떼를 일군 아리아 인과 셈인이 여타 미개인들과 분리, 유목생활 시작, 곡물 경작은 아직. 이들이 육류와 젖을 풍부히 섭취한 것은 이 두 인종이 다른 인종을 압도하는 발전을 이룩한 원인이었을 것(동쪽 대륙)/ 인공관개, 옥수수 등 식용작물 재배, 어도비와 돌로 건축, 목조건물, 금속가공법은 알고 있었으나 철은 예외, 따라서 석기 사용(서쪽 대륙)


높은 단계
: 철광석 제련, 문자의 발명, 문헌기록(동반구에서만 독자적으로 진행). 영웅시대의 그리스 인, 로마 건설 전의 이딸리아 부족들, 바이킹 시대의 노르만 인 등. 철제 쟁기날의 사용, 농경의 시작, 인구의 급속한 증가. 호머의 서사시에 묘사된 시대.

③ 문명 - 자연산물에 대한 더 발전된 가공 기술을 습득하는 시기. 본래적 의미에서의 공업 및 기술의 시기.

4. 미개와 문명: 씨족사회의 해체와 문명의 도래의 경제적 제조건

① 씨족사회의 특징

야만의 중간 단계에서 발생하여 높은 단계에서 더욱 발전한 씨족은 미개의 낮은 단계에서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한 개의 부족은 대개 두 개의 씨족으로 편제되어 있고 이 씨족이 인구 증가에 따라 몇 개의 딸 씨족으로 갈라진다. 부족 자체도 다시 몇 개의 부족으로 갈라지며 몇몇 경우에는 혈연관계에 있는 부족들이 모여 동맹을 이룬다.

이 단순한 조직은 그것을 낳은 사회상태를 완전히 만족시킨다. 그것은 그러한 사회상태에 고유한 자연성장적으로 무리를 짓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씨족은 이렇게 조직된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갈등을 조절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깥세계와의 갈등은 전쟁을 통해 해결된다. 전쟁은 부족의 전멸로는 끝날 수 있어도 부족의 예속으로는 끝날 수 없다. 지배와 예속이 있을 수 없다는 데에 씨족제도의 위대함과 한계가 동시에 있다. 씨족 내부에서는 권리와 의무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없었다. 공적인 일의 참가, 피의 복수 등이 권리인가 의무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또한 부족이나 씨족이 여러 계급으로 갈라지는 일도 있을 수 없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이 상태의 경제적 토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② 씨족사회의 경제적 토대

인구는 매우 희박하였다. 부족은 광대한 수렵지역에 둘러싸여 있고 다른 부족과의 경계를 이루는 중립적인 방어 삼림이 있었다. 분업은 순전히 자연 성장적으로, 남녀 사이에만 있었다. 남자는 전쟁을 치르고,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며, 먹을 거리와 그에 필요한 도구를 조달한다. 여자는 집안일을 돌보고 음식과 옷을 만든다. 이들은 각각의 영역에서 주인이다. 집안 살림은 몇 개의 가족들에 의해 공산주의적으로 운영된다. 공동으로 만들어 이용하는 것은 공동 재산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만 문명 사회의 법학자와 경제학자들이 떠벌리고 다니는 “자기 노동으로 얻은 재산”이라는 말이 통용될 수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소유가 아직도 자신의 존립근거로 내세우는 최후의 법률적 구실이다.

③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업과 그 결과들

규칙적 교환의 등장: 아시아 등지에서 길들여 번식시킬 수 있는 동물을 발견하였다. 가장 선진적인 몇몇 부족들(아리아 인, 셈 인 등)에게 가축 길들이기와 사육관리가 주요한 노동부문으로 되었다. 목축부족이 다른 미개인 집단과 분리되었다(목축과 수렵 ․ 채집의 분업). 목축 부족은 다른 미개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했을 뿐 아니라 생산하는 생활수단 또한 달랐다. 이로써 처음으로 규칙적인 교환이 등장하게 되었다. 최초에는 씨족장을 통한 부족간 교환이 이루어졌으나 가축 떼가 개별재산으로 되기 시작하자 개인들 간의 교환이 점점 우세해졌으며 마침내 그것이 교환의 유일한 형태가 되었다. 가축은 모든 상품을 평가해주고 어디서나 교환할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요컨대 가축은 이미 이 단계에서 화폐의 기능을 획득했다. 이와 같이 필연적으로 상품 교환 발생 당초에 화폐 상품에 대한 욕구가 발전하였다.

농경 및 기술적 성과: 늦어도 미개의 중간 단계에서 전야 경작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가축을 위해 곡물을 재배하였으나 얼마 안 가 사람의 식료로 곡물을 이용하였다. 경작지는 아직 부족의 소유였으며 처음에는 씨족이, 후에는 세대 공동체가, 마지막에는 개인들이 이를 양도받아 이용하였다. 그들은 일정한 보유권을 가질 수 있었을 따름이다. 이 단계에서 아직은 철을 얻는 방법은 모르고 있었으며 따라서 청동이 사용되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석기를 몰아낼 수 없었다. 금과 은이 장신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노예제의 발생: 모든 부문에서 생산이 증대됨으로써 인간의 노동력은 자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씨족, 세대 공동체, 개별 가족의 각 성원에게 부과되는 노동량이 증대되었다. 이제 새로운 노동력을 들여와야만 했다. 전쟁이 이를 공급하였다. 전쟁 포로는 노예가 되었다.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업은 노동 생산성의 상승과 재부의 증대 및 생산 분야의 확대와 더불어 당시의 전체 역사적 조건 아래서 필연적으로 노예제를 가져왔다. 그 결과 두 계급으로의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열이 일어났다. 주인과 노예, 착취자와 피착취자.

부권제로의 이행: 가축 떼가 개별적 가장의 소유로 이행하면서 가족에 혁명이 일어났다. 생계획득은 남자의 일이었고 생계수단은 언제나 남자의 소유였는데, 가축 떼가 생계를 위한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가축은 남자의 것이었고 가축과 교환해 얻은 일체의 것, 생업에 의해 얻은 일체의 잉여가 남자의 것이었다. ‘사나운’ 전사와 사냥꾼은 집에서 여자 다음의 자리에 만족하였지만 ‘온화한’ 목축민은 자기의 부를 뽐내면서 여자를 두 번째 자리로 밀어냈다. 그러나 여자는 불평할 수 없었다. 가족 밖에서의 분업의 변화가 가족 내 관계를 뒤집어 버렸기 때문이다. 전에는 가정에서의 여자의 지배를 보장해 주었던 바로 그 원인, 즉 여자가 가사노동에만 종사한다는 것이 이제는 가정에서의 남자의 지배를 보장해주었다. 여성의 해방, 남녀의 평등은 여자가 사회적 노동에서 배제되어 사적인 가사 노동에만 갇혀있는 한 불가능하며 앞으로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이 여기서 이미 명백해진다. 여성의 해방은 그들이 거대한 사회적 규모로 생산에 참여할 수 있기 되고 여성이 가사 노동에 시간을 별로 빼앗기지 않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는 현대 대공업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며, 이 대공업은 여성 노동을 대대적으로 허용할 뿐 아니라 사적인 가사 노동을 점점 더 공적인 산업으로 해소하려 한다.

이제 남자가 사실상 가정을 지배하게 됨녀서 남성 전제의 마지막 장벽이 없어졌다. 모권제의 전복, 부권제의 도입, 대우혼에서 일부일처제로의 점차적 이행. 그러나 이로써 낡은 씨족 제도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개별 가족이 씨족과 대립하여 그것을 위협하는 하나의 세력이 되었다.

④ 제2의 거대한 분업과 그 결과

철기의 등장과 생산력의 발전: 역사에서 혁명적 역할을 한 모든 원료 가운데 최후의 원료이자 가장 중요한 원료인 철이 인간에게 봉사하게 되었다. 철검의 시대, 영웅의 시대의 도래. 철은 대규모의 전야 경작과 광대한 숲의 개간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어떤 금속이나 돌도 당해낼 수 없는 견고하고 날카로운 도구를 수공업자에게 제공하였다. 망루와 총구멍이 설치된 석재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부족의 중심지가 되었다(위험과 방위 필요의 증대, 건축술의 진보). 개인의 부가 급속히 증대하였다. 토지 경작과 수공업의 다양함과 기교가 더욱 더 발전하였다. 이렇듯 다양한 활동을 이제 더 이상 한 개인의 손으로는 해낼 수 없었다. 제2의 거대한 분업이 일어났다(수공업이 농업에서 분리).

노예제의 확립: 생산이 증가하고 노동생산성이 끊임없이 향상되자 인간 노동력의 가치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제 노예제가 사회 제도의 본질적인 구성 부분이 되었다.

상품생산의 발생: 수공업과 농업의 분리로 직접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생산이 발생하였다. 이와 나란히 부족내/부족간 교환 뿐 아니라 해외 무역도 발생하였다.

계급분화 및 공동체의 파괴: 자유민과 노예의 차별과 나란히 부자와 빈자의 차별이 나타났다. 가장의 재산의 차이는 낡은 공산주의적 세대 공동체를 파괴하였다. 이와 함께 세대 공동체의 책임 하에 있던 토지의 공동 경작도 소멸하였다. 완전한 사적 소유로의 이행은 일부일처제로의 이행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가 되기 시작했다.

씨족이 기관이 국가의 맹아로 전환: 인구가 조밀해짐에 따라 혈연 부족간 결속이 필요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이 부족들을 융합하는 것이, 이와 함께 떨어져 있는 부족 영토들을 하나의 전체 민족 영토로 융합하는 것이 벌써 필요하게 되었다. 민족의 군사 지휘자가 상설적 공직자가 되었고, 민화가 나타났다. 군사 지휘자, 평의회 등은 군사적(전쟁과 전쟁 조직이 민족 생활의 정규적인 기능이 되었기 때문) 민주주의로 발전해 가던 씨족 사회의 기관을 이루었다. 이웃의 부는 부 획득일 제1의 목적으로 삼는 민족들의 탐욕을 자극했다. 전에는 침해에 대한 복수나 부족한 영토의 확장을 목적으로 할 때에만 전쟁을 했지만, 이제는 오로지 약탈을 위한 전쟁이 벌어졌으며 상시적인 생업이 되었다. 전쟁의 이와 같은 상시화는 군사 지휘자의 권력을 강화시켰고, 관습적으로 가족 중에 후계자를 선출하던 것이 점차 세습제로 이행되었다. 이로써 세습적 왕권과 세습적 귀족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이리하여 씨족 제도의 기관들은 인민 속의 자기의 뿌리와 점차 유리되어 전체 씨족의 대립물로 전화하였다. 씨족제도의 기관들은 자신들의 일을 자유롭게 처리하는 부족의 조직에서 이웃을 약탈하고 억압하기 위한 조직으로 전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민의의 도구에서 자기 인민에 대한 지배와 억압을 자행하는 자립적 기관으로 전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부에 대한 탐욕이 씨족 성원들을 부자와 빈자로 분열시키지 않았다면, “동일한 씨족 내부에서의 재산상 차이가 씨족원들의 이해의 통일성을 그들 사이의 적대로 전화시키지”(맑스) 않았다면, 노예제 확대의 결과 자신의 노동을 통한 생계수단 획득을 노예의 일로, 따라서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하게 되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⑤ 문명의 도래, 제3의 분업

상인계급의 출현: 이리하여 우리는 이제 문명의 문턱에 도달하였다. 문명은 이 모든 기존의 분업을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날카롭게 만듦으로써 강화했을 뿐 아니라 문명에 고유한 제3의 분업을 추가하였다. 즉 더 이상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오직 생산물의 교환에만 종사하는 계급 ― 상인 ― 이 등장하였다. 상인 계급은 생산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으면서 전체적 차원에서 생산의 지휘권을 획득하여 생산자들을 경제적으로 자신에게 예속시켰다. 생산자들에게 교환의 노고와 위험을 덜어준다는, 생산물의 판로를 원거리 시장에까지 확대시켜 준다는, 그런 이유에서 자기들이 주민 중에서 가장 유익한 계급이라는 구실 하여, 기생자들의 계급이 형성되었다. 이 계급은 실제로는 극히 보잘것없는 노력을 기울여 놓고서는, 그에 대한 보수로 국내외 생산의 알짜배기를 독차지하여 엄청난 부와 사회적 영향력을 빠른 속도로 획득해갔다. 그런데 상인층과 함께 금속 화폐, 즉 주화가 출현했으며 이로써 비생산자가 생산자와 그의 생산을 지배할 새로운 수단이 나타났다. 상인은 다른 모든 상품을 은폐된 형태로 내포하고 있는 이 상품 중의 상품, 화폐를 손에 넣음으로써 생산의 세계를 점차 지배하게 되었다.

토지의 상품화: 분할지에 대한 개인의 점유권은 원래 씨족 또는 부족에 의해 부여된 것인데, 이 점유권이 강화되어 분할지가 개인들의 세습 재산이 되고 말았다. 토지에 대한 씨족 공동체의 요구권이라는 질곡에서 벗어나자 토지는 무제한적 보유의 대상일 뿐 아니라 양도의 대상이게 되었다. 토지 소유자는 지금까지 자기와 토지를 굳게 묶어놓았던 유대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제 토지는 판매해도 좋고 저당잡혀도 좋은 상품이 되었다. 난교와 매춘이 일부일처제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이제부터는 저당권이 토지 소유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게 된다.

부의 집중: 상업이 확대되고 화폐 및 고리대금업, 토지 소유 및 저당권이 생겨나면서 소수계급의 수중으로 부의 집적과 집중이 급속히 이루어졌다. 이와 더불어 대중의 빈곤이 심화되었다. 신흥 부자 귀족은 옛날의 부족 귀족을 완전히 뒷전으로 밀어내버렸다. 자유민의 이러한 계급 분화와 나란히 노예들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여 그들의 강제 노동이 전체 사회의 상부 구조의 기초를 이루었다.

씨족제도의 변화: 씨족제도의 전제였던 정착생활은 상업, 토지 소유의 이전 등으로 인해 거주지의 이동과 변동이 생김에 따라 파괴되었다. 씨족 내부의 계급 분화는 씨족제도가 해결할 수 없는 이해 갈등을 만들어냈으며, 새로이 유입된 주민 대중에 대해서 씨족 공동체는 폐쇄적이고 특권적인 단체로 대립하였다. 씨족제도는 어떠한 내부적 대립도 없는 사회에만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전체적인 경제적 생활 조건들로 말미암아 자유민과 노예, 착취하는 부자와 착취당하는 빈자로 분열될 수밖에 없는 사회, 이 대립을 점점 더 극단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사회가 나타났다. 이 사회는 이 계급들 상호간의 끊임없는 공공연한 투쟁 속에서만 혹은 제3의 세력의 지배 하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 외견상 서로 싸우는 계급들 위에 서 있는 제3의 세력은 계급들의 공공연한 충돌을 억눌렀고 기껏해야 경제적 영역에서만, 이른바 합법적 형태로만 계급투쟁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씨족제도는 수명을 다하였다. 그것은 분업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산물인 계급으로의 사회분열로 말미암아 파괴되었다. 그것은 국가로 대체되었다.

5. 문명사회의 총괄로서 국가의 발흥

① 역사적 형태들

아테네: 씨족 사회 자체에서 발전한 계급대립으로부터

로마: 폐쇄적 귀족제로 변질된 씨족 사회 바깥에 있던 평민의 승리, 씨족제도의 폐허위에서

독일: 광활한 정복 영토 지배의 직접적 결과로서(but 기존 주민과의 투쟁x+정복민/피정복민의 경제적 발전단계가 거의 비슷→변형된 씨족제도가 오랫동안 존속

② 국가의 본질

국가는 외부에서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는 이 사회가 해결할 수 없는 자기 모순에 빠졌으며, 자기의 힘으로 없앨 수 없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물로 분열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다. 이 대립물, 즉 서로 다른 경제적 이해를 가진 계급들이 쓸데없는 투쟁으로 자신과 사회를 파멸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사회 위에 있으면서 충돌을 완화시키고 ‘질서’의 틀 내에 잡아둘 권력에 대한 필요에서 국가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발생하였으나 사회 위에서 점점 더 사회에 낯선 것이 되어가는 권력이다.

③ 국가의 특징

지역에 따른 국민의 조직

공권력의 설립: 자기자신을 무장력으로 조직하는 주민과 일치하지 않는 무장력. 이전에는 없었던 물적 부속물들을 갖춤(감옥 등). 국가 내부에 계급 대립이 날카로워지고 인접한 국가들이 더 강대해질수록 강화됨. 공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세제도와 국채의 발행. 예외적인 권한을 누리는 관료들.

지배계급의 국가: 국가는 계급 대립을 억제할 필요에서 발생했고 이 계급 충돌 한가운데서 발생했기에 대개 가장 강력한 계급,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이다. 이 계급은 국가의 힘을 빌어 정치적으로도 지배하는 계급이 되며 국가는 피억압 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새로운 수단이 된다.(노예소유자들의 국가로서의 고대국가, 귀족의 기관으로서의 봉건국가, 자본에 의한 임금노동 착취의 도구로서의 현대 대의제국가) 그러나 재산상의 차이를 정치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국가의 본질은 아니다. 이는 국가 발전의 낮은 단계에서 그러하고 민주 공화제에서 유산계급의 권력은 간접적이지만 한층 더 확실한 방법으로 행사된다.

역사성: 이상에서 보았듯, 국가는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다. 계급으로의 사회적 분열과 연결된 경제 발전의 일정 단계에서 국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빠른 걸음으로 이러한 계급들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산의 직접적인 장애물이 되는 단계로 접근해가고 있다. 계급의 발생이 불가피했듯 계급의 소멸도 불가피하다. 계급의 소멸과 함께 국가도 불가피하게 소멸할 것이다. 생사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에 기초하여 생산을 새로이 조직하는 사회는 전체 국가 기구를 그것이 응당 가야 할 곳으로 보낼 것이다: 물레, 청동 도끼와 나란히 국가를 전시할 고대 박물관으로.

6. 문명사회에 대하여

분업에 따른 상품생산의 전면적 발전

공동생산 및 공동소유가 고립적 생산 및 개별적 소유로 전환

생산물 및 생산이 내적 필연성과 합법칙성을 가진 경제법칙들에 의해 규제

사회의 계급적 분열

국가의 발생

이러한 특징을 띠는 문명은 고대 씨족 사회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해냈다. 그러나 문명이 그렇게 해낸 것은 문명이 인간의 가장 추악한 충동과 정욕을 발동시키고, 인간의 다른 모든 소질을 희생시키면서 그것들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문명이 시작된 첫 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인 탐욕이 문명을 추동해왔다. 탐욕적인 개개인의 부,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목표였다. 과학의 가속적 발전과 반복적인 예술의 전성기가 문명의 태내에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그러한 것들이 없이는 우리 시대의 부를 남김없이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가 문명의 기초인 만큼, 문명의 발전은 끊임없는 모순 속에서 이루어진다. 생산에서 진보가 이루어질 때마다 그것은 동시에 피억압 계급, 즉 대다수 사람들의 처지가 퇴보함을 의미한다. “부는 인민과 대립하는, 제어할 수 없는 힘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창조물 앞에서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 있다...만약 진보가 과거의 법칙이었듯이 미래의 법칙이기도 하다면, 단순히 부만추구하는 것이 인류의 종국적 사명은 아니다...부를 유일한 궁극적 목표로 하는 역사 궤도의 종착역으로서 사회의 해체가 우리를 위협하며 다가오고 있다...한층 높은 다음 단계의 사회...그것은 고대 씨족의 자유, 평등, 우애의 ― 한층 높은 형태의 ― 부활이 될 것이다.”

7. 생각해볼 것들 & 흥미로운 부분들

① 문명을 추동해온 것에 관하여

엥겔스는 ‘문명’의 첫 날부터 지금까지 개별적 부에 대한 탐욕이 문명을 추동해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지나치게 ‘단순한 가설’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관점이 문명사회를 극복할 제조건의 형성과 힘의 발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수천 년에 걸친 탐욕추구 과정의 자연스러운 부산물로? 다르게 말하면, 생산력 발전의 양면 중 발전된 생산력으로부터 인간의 소외라는 측면만 부각된 것은 아닌지.

② 친족관계에 상응하는 가족형태를 추적한 모건의 연구방법이 획기적인 이유

“가족은 능동적인 요소이다. 그것은...사회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함에 따라 낮은 형태에서 높은 형태로 전진한다. 반대로 친족 체계는 수동적이다. 그것은 가족이 시간과 함께 이룬 진보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기록하며, 가족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난 뒤에만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모건)

“그리고 정치, 법률, 종교, 철학 등의 각 체계에서도 사태는 일반적으로 이와 똑같다.”(맑스)

이 각각의 능동적인 요소에 대한 연구가 곧 유물론적 역사 연구. 그렇다면 각각의 시기에 이 ‘능동적인 요소’들은 생산력 및 생산방식과의 관계 속에서 정해지는 것?

③ 군혼에서 대우혼으로의 변화

“원시사에서 가족 발전의 요체는 양성간의 결혼 공동체가 지배하는 범위가 처음에는 부족 전체를 포괄하는 수준이었다가 지속적으로 좁아지는 데 있다. 처음에는 가까운 친족이, 다음에는 점차 먼 친족이, 그리고 급기야는 결혼으로 인척관계가 된 친족까지 배제됨으로써 결국 어떤 종류의 군혼도 실제로 불가능하게 되며, 종국에는 잠시 느슨하게 결합되는 한 쌍의 배우 관계[배우혼]만이 남게 된다.” 58p.

엥겔스는 군혼이 점점 더 불가능해지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여기서 “근친상간을 방지하려는 충동이 몇 번이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단 그것은 명확한 목적 의식 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암중 모색적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모건은 결과론적인 방식으로 “혈연 관계가 없는 씨족들 사이의 결혼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강력한 종족을 만들어낸다”고 하고, 엥겔스는 이를 자연도태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미개인들이 점차 친족 간 결혼을 기피하는 ‘관념’을 가지게 된 원인의 하나로 제시되는 것은 이 텍스트에서 이러한 ‘자연도태’에 대한 가설 뿐인데, 좀 더 자세하고 역사적이며 유물론적인 설명이 필요한게 아닌가 싶다.

또한 엥겔스는 군혼으로부터 단혼으로의 이행이 본질적으로 여성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무조건적으로 정당하다고 하면서, “경제적 생활조건들이 발전할수록, 그리하여 고대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인구 밀도가 증가함에 따라 예부터 내려오던 성관계가 태고의 소박한 성격을 잃게 될수록, 이 성관계는 여자들에게 더욱더 굴욕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여자들은 더욱더 절실하게 정조권...을 갈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경제적 조건들과 정서의 변화가 여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굴욕감을 가지게 하였는지.

이 밖에도 결정적인 전제나 추론에서 급관념적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가령 67p. 가부장이 된 남성이 종래의 상속순위를 파기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모권제의 파기가 추동되었다는 설명.

④ 현대적 의미의 가족형태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이유

“현대의 가족은 노예제 뿐만 아니라 농노제도 맹아 형태로 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농경을 위한 노력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가족은 그 후 사회와 그 국가에서 광범하게 발전한 온갖 대립들을 축소판의 형태로 내포하고 있다.”(맑스) 69p.

⑤ 일부일처제

“일부일처제는 결코 개인적 성애의 소산이 아니었으며, 그것과는 절대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왜냐하면 결혼은 변함없이 정략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는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즉 원시적인 자연 성장적 공동 소유에 대한 사적 소유의 승리에 기초한 최초의 가족 형태였다...그러므로 단혼은 남녀의 화해로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며, 더욱이 이화해의 최고 형태로서 나타난 것은 더욱더 아니다...그것은 한 성에 의한 다른 성의 예속으로서, 그때까지 선사 시대 전체를 통해서도 나타난 적이 없던 양성 간의 항쟁의 선언으로서 등장한 것이다...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 대립은 단혼에서의 남녀의 적대적 발전과 일치하고, 또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일치한다. 단혼은 위대한 역사적 진보였지만 동시에 그것은 노예제 및 사적 부와 함께,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저 시대, 모든 진보가 동시에 상대적 퇴보이며 한 사람의 행복과 발전이 다른 사람의 불행과 억압을 통해서 달성되는 그러한 시대를 열어놓았다. 단혼은 문명 사회의 세포 형태인바, 우리는 이것을 실마리로 해서도 문명 사회 속에서 완전히 전개되는 이 대립들과 모순들의 본성을 연구할 수 있다.”76-77p.

⑥ 프롤레타리아트와 개인적 성애

부르주아적 결혼: 당사자의 계급적 처지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정략 결혼. 극심한 매춘으로의 변모.

“아내와의 관계에서 성애가 진정한 규칙이 되고 또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피억압 계급들 사이에서뿐이다...그런데 이 계급에게서는 고전적 일부일처제의 기초[재산의 보존과 상속]도 모두 제거되어 있다...요컨대 프롤레타리아트의 결혼은 어원적 의미에서는 일부일처제지만 역사적 의미에서는 결코 일부일처제가 아니다.” 83p.

“성애는 그 본성상 배타적이기 때문에” 결혼의 완전한 자유가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완전한 의미의 일부일처제가 실현될 것이다?



저작자 표시
Posted by 순덕한 호랭이 트랙백 0 : 댓글 1

어떤 날

2011/01/28 12:16 from 단상


“아침에 눈 뜨자마자 등록금 내라고 문자가 와 있는거야. 500만원 넘지. 1년에 천 만원 깨지는게 말이 되냐? 졸업하면 대체 빚이 얼마야...몰라 리모델링 중이니까 3월엔 들어가겠지. 아 아침부터 문자를 보내고 지랄이야 성질나게.”


과외 하고 돌아오는 602번 버스 안에 기타를 맨 여학생이 신경질을 마구 내더니 홍대 앞에서 내렸어. 하늘은 쾌청한데 습습하게 품안을 헤집는 추위가 버스 문이 열릴 때마다 기어들어왔던 것 같아. 여학생의 이야기가 너무 선명하게 귀에 꽂혀 마음 한 쪽이 침침했지만 금새 잊고 신이 났지. 오늘은 너도 보고, 백만년 반에 공연도 보는 날이었으니까.


신나서 공연 시간표를 보며 동선을 짜고 있는데 뜬금없이 전화가 왔네. 한 번 만 더하면 돈 받는 날이라, 며칠 남지 않은 네 생일에 장갑을 사줄까, 운동화를 사줄까, 생일상을 차려줄까 궁리하고 있었는데, 그간 뭐빠지게 열심히 가르친 탓에 성적이 많이 올랐다며 수업을 그만 하자 하네. 지갑엔 다음 주 월요일까지 버틸 3만원 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날이 저물고, 홍대 앞 거리마다 사람들은 모여들고, 2만원으로 우리 표를 샀지. 시발, 나 졸라 멋있는거 같애. 전재산의 2/3를 공연티켓에 쓰다니. 곱고 서툰 노래가 공연장을 메우는데 내 머릿속은 온통 돈 걱정에 복잡하고, 너무 안정적으로 사는 거 같애서 죄책감 가졌던 게 불과 며칠 전인데 하루 아침에 현실이 시궁창같이 느껴지고. 노래는 귀로 들어갔다 여기 심장까지 이르지 못해 되튕겨 나가고. 그래서 차라리 읊조리는 노래들보다 쿵쾅쿵쾅하던 그 브라스밴드가 좋았던 거 같아. 소리가 온 몸을 채우니까 골치아픈 생각도 잠시, 사라져버렸거든.


그들이 달빛요정을 추모하는 방식은 그런거였어. 그냥 놀던 대로 노는 거. 더 신나게 노는거. 그게 왠지 좋아서, 온통 내일부터의 밥값 같은 거에 가 있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던 것 같애.


그런거 뭐라고 하나. 헤비메탈? 하여튼 그런 음악은 너무 건조해. 막 정전기 일어날 것처럼 건조해서 마음을 긁어 마구 긁어. 철수세미같이. 순 날티나게 생긴 한 사람이 노래를 하네.

‘저기 나의 친구가 가고/여기 달빛이 오네 There goes my friend/Here comes moonlight’

그 사람은 정말로 달빛으로 온걸까? 차갑게 식은 지하 단칸방을 나와 정말 무대에 있는걸까?


지난 반 년 동안 한 번도 빼먹지 않고 함께 갔었는데, 정작 오늘이 선고일인걸 깜빡해버렸어. 이죽거리고 호통치던 판사가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는 께름칙하게도 분명하지만, 난 네가 끝까지 당당하도록 옆에 있어주고 싶었는데. 이런 상 병신이 있나.


이렇게 거지같은 글을 쓰고 있는데 난 뭐 북받친다고 울컥 눈물이 나네. 알바 사이트를 뒤적거려도 당장 한 달치 생활비를 선불해줄 일거리가 눈에 띄지 않아 그냥 엄마한테 말해버렸거든. 난 참 더럽게도 쓸모없는 인간이더라고 거기서는.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엄마가 통장을 하나 줘. 동생이 처음에 나 모르게 들어놨던 주택청약통장이야. 다음 과외를 소개 받아서 한 달치 소개비를 떼주고 날 때까진 버틸만큼의 돈이 들어있었어. 동생 저금통에서 500원 짜리 털 때도 이렇게 죄스럽진 않았는데. 텔레비전 앞에 붙박이처럼 앉아있던 아빠가 갑자기 반응을 보이네. 아빠, 그냥 보던 텔레비전 계속 보시면 안될까요. 그렇게 인상 찌푸린다고 당장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아빤 잘 모르는게 하나 있어. 이젠 내가 마음을 바꿔도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돈은 벌 수 없어. 그렇게 살면 난 죽어. 아빤 그걸 몰라.


사실 이거 별거 아니야. 사채를 끌어다 쓴 것도 아니고 청약부금 하나 깼을 뿐이야. 이런 거 이제 시작일 수도 있어. 담금질하는거야. 씩씩해져야지. 진짜 힘든 사람들이 보면 내 머리를 막 헝클어뜨리면서 그럴거야 “에그, 그런거 가지고 그랬쪄?”


그래도 어쨌든 눙물이 나서 엉엉 거리며 담배를 피는데 여기에 달빛요정이 있는 거 같다 느껴졌어. 전투형 달빛 요정이.


난 변태같게도 돈 떨어지고 똥줄타니까 잡생각일지언정 마구마구 생각이 돼. 글자들이 머릿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말들이 가슴에서 쿵쾅쿵쾅 난리를 쳐. 그러니까 지금을 씩씩하게 견뎌야해. 통장잔고 3,157원인데도 당장 네 생일선물 걱정하는 나를 사랑해야해.


돈 없이도 나를 살찌우는 것들, 돈 없어야 나에게 풍요롭게 생겨나는 것들 그런 거에 접속해야 해. 그게 내가 사는 길이고 진짜 사는 길이야.


요런 글도 미화+궁상+척하는 글일까봐 염려되지만, 어쩌겠어 난 지금은 쏟아내야 살 것 같아. 그래야 당장 주어진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모르겠어 끝은.

노랫말 같기도 하고 넋두리 같기도 한 이 글의 끝도

이렇게 흔들리며 가고 있는 내 삶의 끝도

그런건 모르겠어.

  


저작자 표시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과 말 사이  (0) 2011/09/27
어떤 날  (4) 2011/01/28
맑스의 코뮌, 레닌의 코뮌  (0) 2010/10/30
우리가 만나야 할 레닌  (0) 2010/10/23
오랜만에  (0) 2010/08/10
개념글  (0) 2010/06/03
Posted by 순덕한 호랭이 트랙백 0 : 댓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