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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5일 연구공간 L 맑스주의 세미나 발제문



엥겔스,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발제문


1. 유물론적 역사연구


엥겔스에 따르면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은 ‘자신의 유물론적 역사 연구의 성과들과 결부하여 모건의 연구 결과를 서술하고 그 결과들이 가지는 전체적인 의미를 밝히고자 했던’ 맑스의 유지를 집행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서술되고 가정되는 역사는 다음과 같은 유물론적 관점에 입각하고 있다. 즉 ‘직접적 생활[삶]의 생산과 재생산이 종국적으로 역사를 규정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요인 자체는 생활수단들의 생산과 인간 자체의 생산이라는 두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전제를 받아들이면 역사의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사회적 제도는 두 종류의 생산에 의해 규정된다. 한편으로 노동의 발전단계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


이렇듯 유물론적 역사연구의 중요한 한 축인 가족사 연구는 1877년 모건의 저작 『고대 사회』에서 제시된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들로 인해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 이전의 가설들로는 해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친족형태들의 기원을 규명하여 처음으로 가족사 전체의 윤곽을 그릴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모건의 연구가 이전까지의 신화적, 관념적 형태의 가족사 연구 방법 및 관점을 철저히 분쇄하고 유물론적 역사연구의 기틀을 가족사 분야에 확립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모건의 연구에 기반한 원시사를 보기에 앞서, 제4판 서문을 통해 가족사 분야의 유물론적 역사연구의 정립과정을 먼저 살펴보자.


2. 가족사 연구의 발전 과정


1860년대 초까지 가족사는 완전히 모세5경의 영향 하에 있었다. 사람들은 경전에 묘사된 가부장제적 가족형태를 가장 오래된 가족 형태로 간주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당대의 부르주아적 가족과 동일시하였다. 물론 사람들은 고대사의 몇몇 민족들과 현존하는 몇몇 야만인들이 모계혈통을 따른다든가, 오늘날에도 일정한 규모의 집단 내부에서의 결혼을 금지하는 민족들이 많다는 등의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사례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가족사 연구는 바호펜의 『모권』이 출간된 1861년부터 시작되었다. 바호펜은 이 책에서 ① 인간들은 처음에 그가 ‘난교’라고 부적절하게 칭한 무제한적 성교생활을 했고, ② 이러한 관계에서 혈통은 여계에 따라서만 따질 수 있었으며, ③ 그 결과 여성은 높은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완전한 여성 지배에 이르렀고, ④ 단혼으로의 이행은 태고의 종교적 계율의 침해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여자는 일정 기간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맡김으로써 이를 보상[속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주장했다. 바호펜은 ‘난교’에서 일부일처제로, 모권에서 부권으로의 발전을 종교적 표상의 발전 결과로 설명함으로써 신비주의적 견해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난교’의 흔적을 고대 고전 문헌에서 허다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 이 관습은 이미 소멸했지만 여자가 일정 기간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허락하는 것을 대가로 단혼의 권리를 사야 한다는 형태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 따라서 혈통은 최초에는 오직 여계에 따라서만 따질 수 있었다는 것, 단혼의 시기에도 오랫동안 여계만이 중요시되었다는 것, 어머니의 이러한 시초의 지위는 여성 일반에 대하여 그 후에는 그들이 다시는 획득하지 못한 그러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였다는 점을 논증했다.


‘천재적 신비주의자’ 바호펜의 후계자는 무미건조한 법률가 J. F. 맥레넌이었다. 맥레넌은 고대와 현대의 여러 미개 민족과 야만 민족들 사이에서 약탈혼의 형태를 발견하는데, 이러한 혼인 형태의 형성원인을 족외혼 집단과 족내혼 집단 사이의 엄격한 대립을 설정함으로써 해결한다. 즉 족외혼 부족은 다른 부족으로부터만 아내를 얻을 수 있었고 야만 시기에 상응하는 부족 사이의 부단한 전쟁으로 인해 약탈에 의해서만 아내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이러한 대립은 실상 그 자신의 표상 가운데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멕레넌이 몰랐을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을 자신의 전체 이론의 기초로 삼고 있다고 비판한다. 맥레넌의 이같은 이론이 영국에서 확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일체의 자유로운 고찰, 따라서 일체의 결정적인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족외혼이라 불리는 것이 도처에 널리 보급되어 있다는 것, 모권적 혈통제도를 본원적인 것으로 인정한 점 등의 기여를 하였지만 그의 이론의 법률가적 편협함은 이후 가족사 연구에 엄청난 해를 끼쳤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단혼으로 짜여진 맥레넌의 말쑥한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이 속속 출현하였다. 일부 민족들 사이에 일련의 남자들이 일련의 여자들을 공유하는 결혼형태가 있었다는 증거들이 나타난 것이다. 러복은 이러한 군혼communal marriage을 역사적 사실로서 승인하였다. 그 직후인 1871년 모건은 아메리카 의 이로쿼이 족에게 특유한 친족체계에 대한 연구 결과를 가지고 등장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었다. ① 아메리카 인디언의 친족체계는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의 많은 부족들에게서도 변용된 형태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 ② 이 친족체계가 하와이와 기타 오스트레일리아의 섬들에서 사멸해가고 있는 군혼의 한 형태를 통해 완벽하게 섦여된다는 것, ③ 이 섬들에는 이 결혼 형태와 나란히, 지금은 사멸한 한층 원시족인 군혼형태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친족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 모건의 연구는 친족 체계에서 출발하여 그것에 조응하는 가족 형태를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연구의 길을 열었으며 훨씬 더 과거까지 인류의 선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맥레넌은 모건이 말하는 친족체계 ― 이로쿼이 족에게 통용되는 결혼제도(단혼)에서 실제로 도출되는 촌수와 모순되는 친족체계. 즉 자신의 자
녀들 뿐 아니라 동성 형제/자매의 자녀들을 자신의 아들, 딸이라고 부르는 한편 이성 형제/자매의 자녀들은 조카, 조카딸이라고 부르는 친족체계 ― 가 사회적 예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지만, 모건은 1877년 자신의 저작에서 맥레넌 이론의 토대, 즉 족내혼 집단 대 족외혼 집단의 대립을 무너뜨림으로써 그의 인위적 가설의 잔재까지 쓸어버린다. 족외혼과 족내혼은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군혼이 아직 지배하던 때에 부족은 어머니 편의 혈족에 따른 몇 개의 집단들, 즉 씨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씨족 내부에서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한 씨족의 남자들은 아내를 부족 내부에서 구할 수 없었고 반드시 자신의 씨족 외부에서 구해야 했다. 그러므로 씨족은 엄격히 족외혼을 하였지만, 이 씨족 전체를 포괄하는 부족은 족내혼을 하였다. 모건은 나아가 모권에 따라 조직된 씨족 내에서 부권에 따라 조직되는 이후의 씨족이 발전해나오는 원형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당시까지 모든 역사 서술가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그리스와 로마의 씨족들은, 이제 인디언 씨족들을 설명되었으며 처음으로 가족사 전체의, 원시사 전체의 윤곽을 그릴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3. 선사 시대의 문화 단계들


엥겔스는 모건의 시도를 따라 인류의 선사시대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각각의 시기는 생활수단생산의 진보에 따라 낮은 단계, 중간 단계, 높은 단계로 구분된다. 이는 노동수단 및 가족의 생산과 재생산이 역사를 결정한다는 유물론적 역사관에 부합한다.


① 야만 - 기성의 자연 산물을 획득하는 시기. 인간의 가공물이 자연 산물 획득을 위한 보조 도구로 사용되는 시기.


낮은 단계
: 열대, 아열대의 삼림에 거주. 열매, 견과 등을 채집. 분절 언어의 발생. 이러한 원시 상태의 실재를 증명할 만한 직접적 증거는 없지만 인간이 동물계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이러한 과도적 상태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음.


중간 단계
: 불을 사용해 어류를 식량으로. 기후나 장소에 상관 없이 거주 가능. 초기 석기 시대의 조잡한 석기들. 최초의 무기 사용. 수렵+채집, 식인.


높은 단계
: 활과 화살의 발명. 수렵이 정상적 노동부문의 하나가 됨. 도기 제조법은 아직.


② 미개 - 목축과 경작을 도입하는 시기. 인간활동으로 자연물 생산을 증대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시기. 이 단계부터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의
자연적 조건의 차이(길들일 수 있는 동물 및 재배가능한 작물의 종류와 수)가 의미를 가지게 됨.


낮은 단계
: 도기제조


중간 단계
: 가축을 길들이기 시작, 큰 가축 떼를 일군 아리아 인과 셈인이 여타 미개인들과 분리, 유목생활 시작, 곡물 경작은 아직. 이들이 육류와 젖을 풍부히 섭취한 것은 이 두 인종이 다른 인종을 압도하는 발전을 이룩한 원인이었을 것(동쪽 대륙)/ 인공관개, 옥수수 등 식용작물 재배, 어도비와 돌로 건축, 목조건물, 금속가공법은 알고 있었으나 철은 예외, 따라서 석기 사용(서쪽 대륙)


높은 단계
: 철광석 제련, 문자의 발명, 문헌기록(동반구에서만 독자적으로 진행). 영웅시대의 그리스 인, 로마 건설 전의 이딸리아 부족들, 바이킹 시대의 노르만 인 등. 철제 쟁기날의 사용, 농경의 시작, 인구의 급속한 증가. 호머의 서사시에 묘사된 시대.

③ 문명 - 자연산물에 대한 더 발전된 가공 기술을 습득하는 시기. 본래적 의미에서의 공업 및 기술의 시기.

4. 미개와 문명: 씨족사회의 해체와 문명의 도래의 경제적 제조건

① 씨족사회의 특징

야만의 중간 단계에서 발생하여 높은 단계에서 더욱 발전한 씨족은 미개의 낮은 단계에서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한 개의 부족은 대개 두 개의 씨족으로 편제되어 있고 이 씨족이 인구 증가에 따라 몇 개의 딸 씨족으로 갈라진다. 부족 자체도 다시 몇 개의 부족으로 갈라지며 몇몇 경우에는 혈연관계에 있는 부족들이 모여 동맹을 이룬다.

이 단순한 조직은 그것을 낳은 사회상태를 완전히 만족시킨다. 그것은 그러한 사회상태에 고유한 자연성장적으로 무리를 짓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씨족은 이렇게 조직된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갈등을 조절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깥세계와의 갈등은 전쟁을 통해 해결된다. 전쟁은 부족의 전멸로는 끝날 수 있어도 부족의 예속으로는 끝날 수 없다. 지배와 예속이 있을 수 없다는 데에 씨족제도의 위대함과 한계가 동시에 있다. 씨족 내부에서는 권리와 의무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없었다. 공적인 일의 참가, 피의 복수 등이 권리인가 의무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또한 부족이나 씨족이 여러 계급으로 갈라지는 일도 있을 수 없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이 상태의 경제적 토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② 씨족사회의 경제적 토대

인구는 매우 희박하였다. 부족은 광대한 수렵지역에 둘러싸여 있고 다른 부족과의 경계를 이루는 중립적인 방어 삼림이 있었다. 분업은 순전히 자연 성장적으로, 남녀 사이에만 있었다. 남자는 전쟁을 치르고,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며, 먹을 거리와 그에 필요한 도구를 조달한다. 여자는 집안일을 돌보고 음식과 옷을 만든다. 이들은 각각의 영역에서 주인이다. 집안 살림은 몇 개의 가족들에 의해 공산주의적으로 운영된다. 공동으로 만들어 이용하는 것은 공동 재산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만 문명 사회의 법학자와 경제학자들이 떠벌리고 다니는 “자기 노동으로 얻은 재산”이라는 말이 통용될 수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소유가 아직도 자신의 존립근거로 내세우는 최후의 법률적 구실이다.

③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업과 그 결과들

규칙적 교환의 등장: 아시아 등지에서 길들여 번식시킬 수 있는 동물을 발견하였다. 가장 선진적인 몇몇 부족들(아리아 인, 셈 인 등)에게 가축 길들이기와 사육관리가 주요한 노동부문으로 되었다. 목축부족이 다른 미개인 집단과 분리되었다(목축과 수렵 ․ 채집의 분업). 목축 부족은 다른 미개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했을 뿐 아니라 생산하는 생활수단 또한 달랐다. 이로써 처음으로 규칙적인 교환이 등장하게 되었다. 최초에는 씨족장을 통한 부족간 교환이 이루어졌으나 가축 떼가 개별재산으로 되기 시작하자 개인들 간의 교환이 점점 우세해졌으며 마침내 그것이 교환의 유일한 형태가 되었다. 가축은 모든 상품을 평가해주고 어디서나 교환할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요컨대 가축은 이미 이 단계에서 화폐의 기능을 획득했다. 이와 같이 필연적으로 상품 교환 발생 당초에 화폐 상품에 대한 욕구가 발전하였다.

농경 및 기술적 성과: 늦어도 미개의 중간 단계에서 전야 경작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가축을 위해 곡물을 재배하였으나 얼마 안 가 사람의 식료로 곡물을 이용하였다. 경작지는 아직 부족의 소유였으며 처음에는 씨족이, 후에는 세대 공동체가, 마지막에는 개인들이 이를 양도받아 이용하였다. 그들은 일정한 보유권을 가질 수 있었을 따름이다. 이 단계에서 아직은 철을 얻는 방법은 모르고 있었으며 따라서 청동이 사용되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석기를 몰아낼 수 없었다. 금과 은이 장신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노예제의 발생: 모든 부문에서 생산이 증대됨으로써 인간의 노동력은 자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씨족, 세대 공동체, 개별 가족의 각 성원에게 부과되는 노동량이 증대되었다. 이제 새로운 노동력을 들여와야만 했다. 전쟁이 이를 공급하였다. 전쟁 포로는 노예가 되었다.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업은 노동 생산성의 상승과 재부의 증대 및 생산 분야의 확대와 더불어 당시의 전체 역사적 조건 아래서 필연적으로 노예제를 가져왔다. 그 결과 두 계급으로의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열이 일어났다. 주인과 노예, 착취자와 피착취자.

부권제로의 이행: 가축 떼가 개별적 가장의 소유로 이행하면서 가족에 혁명이 일어났다. 생계획득은 남자의 일이었고 생계수단은 언제나 남자의 소유였는데, 가축 떼가 생계를 위한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가축은 남자의 것이었고 가축과 교환해 얻은 일체의 것, 생업에 의해 얻은 일체의 잉여가 남자의 것이었다. ‘사나운’ 전사와 사냥꾼은 집에서 여자 다음의 자리에 만족하였지만 ‘온화한’ 목축민은 자기의 부를 뽐내면서 여자를 두 번째 자리로 밀어냈다. 그러나 여자는 불평할 수 없었다. 가족 밖에서의 분업의 변화가 가족 내 관계를 뒤집어 버렸기 때문이다. 전에는 가정에서의 여자의 지배를 보장해 주었던 바로 그 원인, 즉 여자가 가사노동에만 종사한다는 것이 이제는 가정에서의 남자의 지배를 보장해주었다. 여성의 해방, 남녀의 평등은 여자가 사회적 노동에서 배제되어 사적인 가사 노동에만 갇혀있는 한 불가능하며 앞으로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이 여기서 이미 명백해진다. 여성의 해방은 그들이 거대한 사회적 규모로 생산에 참여할 수 있기 되고 여성이 가사 노동에 시간을 별로 빼앗기지 않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는 현대 대공업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며, 이 대공업은 여성 노동을 대대적으로 허용할 뿐 아니라 사적인 가사 노동을 점점 더 공적인 산업으로 해소하려 한다.

이제 남자가 사실상 가정을 지배하게 됨녀서 남성 전제의 마지막 장벽이 없어졌다. 모권제의 전복, 부권제의 도입, 대우혼에서 일부일처제로의 점차적 이행. 그러나 이로써 낡은 씨족 제도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개별 가족이 씨족과 대립하여 그것을 위협하는 하나의 세력이 되었다.

④ 제2의 거대한 분업과 그 결과

철기의 등장과 생산력의 발전: 역사에서 혁명적 역할을 한 모든 원료 가운데 최후의 원료이자 가장 중요한 원료인 철이 인간에게 봉사하게 되었다. 철검의 시대, 영웅의 시대의 도래. 철은 대규모의 전야 경작과 광대한 숲의 개간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어떤 금속이나 돌도 당해낼 수 없는 견고하고 날카로운 도구를 수공업자에게 제공하였다. 망루와 총구멍이 설치된 석재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부족의 중심지가 되었다(위험과 방위 필요의 증대, 건축술의 진보). 개인의 부가 급속히 증대하였다. 토지 경작과 수공업의 다양함과 기교가 더욱 더 발전하였다. 이렇듯 다양한 활동을 이제 더 이상 한 개인의 손으로는 해낼 수 없었다. 제2의 거대한 분업이 일어났다(수공업이 농업에서 분리).

노예제의 확립: 생산이 증가하고 노동생산성이 끊임없이 향상되자 인간 노동력의 가치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제 노예제가 사회 제도의 본질적인 구성 부분이 되었다.

상품생산의 발생: 수공업과 농업의 분리로 직접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생산이 발생하였다. 이와 나란히 부족내/부족간 교환 뿐 아니라 해외 무역도 발생하였다.

계급분화 및 공동체의 파괴: 자유민과 노예의 차별과 나란히 부자와 빈자의 차별이 나타났다. 가장의 재산의 차이는 낡은 공산주의적 세대 공동체를 파괴하였다. 이와 함께 세대 공동체의 책임 하에 있던 토지의 공동 경작도 소멸하였다. 완전한 사적 소유로의 이행은 일부일처제로의 이행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가 되기 시작했다.

씨족이 기관이 국가의 맹아로 전환: 인구가 조밀해짐에 따라 혈연 부족간 결속이 필요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이 부족들을 융합하는 것이, 이와 함께 떨어져 있는 부족 영토들을 하나의 전체 민족 영토로 융합하는 것이 벌써 필요하게 되었다. 민족의 군사 지휘자가 상설적 공직자가 되었고, 민화가 나타났다. 군사 지휘자, 평의회 등은 군사적(전쟁과 전쟁 조직이 민족 생활의 정규적인 기능이 되었기 때문) 민주주의로 발전해 가던 씨족 사회의 기관을 이루었다. 이웃의 부는 부 획득일 제1의 목적으로 삼는 민족들의 탐욕을 자극했다. 전에는 침해에 대한 복수나 부족한 영토의 확장을 목적으로 할 때에만 전쟁을 했지만, 이제는 오로지 약탈을 위한 전쟁이 벌어졌으며 상시적인 생업이 되었다. 전쟁의 이와 같은 상시화는 군사 지휘자의 권력을 강화시켰고, 관습적으로 가족 중에 후계자를 선출하던 것이 점차 세습제로 이행되었다. 이로써 세습적 왕권과 세습적 귀족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이리하여 씨족 제도의 기관들은 인민 속의 자기의 뿌리와 점차 유리되어 전체 씨족의 대립물로 전화하였다. 씨족제도의 기관들은 자신들의 일을 자유롭게 처리하는 부족의 조직에서 이웃을 약탈하고 억압하기 위한 조직으로 전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민의의 도구에서 자기 인민에 대한 지배와 억압을 자행하는 자립적 기관으로 전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부에 대한 탐욕이 씨족 성원들을 부자와 빈자로 분열시키지 않았다면, “동일한 씨족 내부에서의 재산상 차이가 씨족원들의 이해의 통일성을 그들 사이의 적대로 전화시키지”(맑스) 않았다면, 노예제 확대의 결과 자신의 노동을 통한 생계수단 획득을 노예의 일로, 따라서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하게 되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⑤ 문명의 도래, 제3의 분업

상인계급의 출현: 이리하여 우리는 이제 문명의 문턱에 도달하였다. 문명은 이 모든 기존의 분업을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날카롭게 만듦으로써 강화했을 뿐 아니라 문명에 고유한 제3의 분업을 추가하였다. 즉 더 이상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오직 생산물의 교환에만 종사하는 계급 ― 상인 ― 이 등장하였다. 상인 계급은 생산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으면서 전체적 차원에서 생산의 지휘권을 획득하여 생산자들을 경제적으로 자신에게 예속시켰다. 생산자들에게 교환의 노고와 위험을 덜어준다는, 생산물의 판로를 원거리 시장에까지 확대시켜 준다는, 그런 이유에서 자기들이 주민 중에서 가장 유익한 계급이라는 구실 하여, 기생자들의 계급이 형성되었다. 이 계급은 실제로는 극히 보잘것없는 노력을 기울여 놓고서는, 그에 대한 보수로 국내외 생산의 알짜배기를 독차지하여 엄청난 부와 사회적 영향력을 빠른 속도로 획득해갔다. 그런데 상인층과 함께 금속 화폐, 즉 주화가 출현했으며 이로써 비생산자가 생산자와 그의 생산을 지배할 새로운 수단이 나타났다. 상인은 다른 모든 상품을 은폐된 형태로 내포하고 있는 이 상품 중의 상품, 화폐를 손에 넣음으로써 생산의 세계를 점차 지배하게 되었다.

토지의 상품화: 분할지에 대한 개인의 점유권은 원래 씨족 또는 부족에 의해 부여된 것인데, 이 점유권이 강화되어 분할지가 개인들의 세습 재산이 되고 말았다. 토지에 대한 씨족 공동체의 요구권이라는 질곡에서 벗어나자 토지는 무제한적 보유의 대상일 뿐 아니라 양도의 대상이게 되었다. 토지 소유자는 지금까지 자기와 토지를 굳게 묶어놓았던 유대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제 토지는 판매해도 좋고 저당잡혀도 좋은 상품이 되었다. 난교와 매춘이 일부일처제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이제부터는 저당권이 토지 소유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게 된다.

부의 집중: 상업이 확대되고 화폐 및 고리대금업, 토지 소유 및 저당권이 생겨나면서 소수계급의 수중으로 부의 집적과 집중이 급속히 이루어졌다. 이와 더불어 대중의 빈곤이 심화되었다. 신흥 부자 귀족은 옛날의 부족 귀족을 완전히 뒷전으로 밀어내버렸다. 자유민의 이러한 계급 분화와 나란히 노예들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여 그들의 강제 노동이 전체 사회의 상부 구조의 기초를 이루었다.

씨족제도의 변화: 씨족제도의 전제였던 정착생활은 상업, 토지 소유의 이전 등으로 인해 거주지의 이동과 변동이 생김에 따라 파괴되었다. 씨족 내부의 계급 분화는 씨족제도가 해결할 수 없는 이해 갈등을 만들어냈으며, 새로이 유입된 주민 대중에 대해서 씨족 공동체는 폐쇄적이고 특권적인 단체로 대립하였다. 씨족제도는 어떠한 내부적 대립도 없는 사회에만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전체적인 경제적 생활 조건들로 말미암아 자유민과 노예, 착취하는 부자와 착취당하는 빈자로 분열될 수밖에 없는 사회, 이 대립을 점점 더 극단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사회가 나타났다. 이 사회는 이 계급들 상호간의 끊임없는 공공연한 투쟁 속에서만 혹은 제3의 세력의 지배 하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 외견상 서로 싸우는 계급들 위에 서 있는 제3의 세력은 계급들의 공공연한 충돌을 억눌렀고 기껏해야 경제적 영역에서만, 이른바 합법적 형태로만 계급투쟁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씨족제도는 수명을 다하였다. 그것은 분업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산물인 계급으로의 사회분열로 말미암아 파괴되었다. 그것은 국가로 대체되었다.

5. 문명사회의 총괄로서 국가의 발흥

① 역사적 형태들

아테네: 씨족 사회 자체에서 발전한 계급대립으로부터

로마: 폐쇄적 귀족제로 변질된 씨족 사회 바깥에 있던 평민의 승리, 씨족제도의 폐허위에서

독일: 광활한 정복 영토 지배의 직접적 결과로서(but 기존 주민과의 투쟁x+정복민/피정복민의 경제적 발전단계가 거의 비슷→변형된 씨족제도가 오랫동안 존속

② 국가의 본질

국가는 외부에서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는 이 사회가 해결할 수 없는 자기 모순에 빠졌으며, 자기의 힘으로 없앨 수 없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물로 분열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다. 이 대립물, 즉 서로 다른 경제적 이해를 가진 계급들이 쓸데없는 투쟁으로 자신과 사회를 파멸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사회 위에 있으면서 충돌을 완화시키고 ‘질서’의 틀 내에 잡아둘 권력에 대한 필요에서 국가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발생하였으나 사회 위에서 점점 더 사회에 낯선 것이 되어가는 권력이다.

③ 국가의 특징

지역에 따른 국민의 조직

공권력의 설립: 자기자신을 무장력으로 조직하는 주민과 일치하지 않는 무장력. 이전에는 없었던 물적 부속물들을 갖춤(감옥 등). 국가 내부에 계급 대립이 날카로워지고 인접한 국가들이 더 강대해질수록 강화됨. 공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세제도와 국채의 발행. 예외적인 권한을 누리는 관료들.

지배계급의 국가: 국가는 계급 대립을 억제할 필요에서 발생했고 이 계급 충돌 한가운데서 발생했기에 대개 가장 강력한 계급,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이다. 이 계급은 국가의 힘을 빌어 정치적으로도 지배하는 계급이 되며 국가는 피억압 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새로운 수단이 된다.(노예소유자들의 국가로서의 고대국가, 귀족의 기관으로서의 봉건국가, 자본에 의한 임금노동 착취의 도구로서의 현대 대의제국가) 그러나 재산상의 차이를 정치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국가의 본질은 아니다. 이는 국가 발전의 낮은 단계에서 그러하고 민주 공화제에서 유산계급의 권력은 간접적이지만 한층 더 확실한 방법으로 행사된다.

역사성: 이상에서 보았듯, 국가는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다. 계급으로의 사회적 분열과 연결된 경제 발전의 일정 단계에서 국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빠른 걸음으로 이러한 계급들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산의 직접적인 장애물이 되는 단계로 접근해가고 있다. 계급의 발생이 불가피했듯 계급의 소멸도 불가피하다. 계급의 소멸과 함께 국가도 불가피하게 소멸할 것이다. 생사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에 기초하여 생산을 새로이 조직하는 사회는 전체 국가 기구를 그것이 응당 가야 할 곳으로 보낼 것이다: 물레, 청동 도끼와 나란히 국가를 전시할 고대 박물관으로.

6. 문명사회에 대하여

분업에 따른 상품생산의 전면적 발전

공동생산 및 공동소유가 고립적 생산 및 개별적 소유로 전환

생산물 및 생산이 내적 필연성과 합법칙성을 가진 경제법칙들에 의해 규제

사회의 계급적 분열

국가의 발생

이러한 특징을 띠는 문명은 고대 씨족 사회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해냈다. 그러나 문명이 그렇게 해낸 것은 문명이 인간의 가장 추악한 충동과 정욕을 발동시키고, 인간의 다른 모든 소질을 희생시키면서 그것들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문명이 시작된 첫 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인 탐욕이 문명을 추동해왔다. 탐욕적인 개개인의 부,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목표였다. 과학의 가속적 발전과 반복적인 예술의 전성기가 문명의 태내에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그러한 것들이 없이는 우리 시대의 부를 남김없이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가 문명의 기초인 만큼, 문명의 발전은 끊임없는 모순 속에서 이루어진다. 생산에서 진보가 이루어질 때마다 그것은 동시에 피억압 계급, 즉 대다수 사람들의 처지가 퇴보함을 의미한다. “부는 인민과 대립하는, 제어할 수 없는 힘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창조물 앞에서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 있다...만약 진보가 과거의 법칙이었듯이 미래의 법칙이기도 하다면, 단순히 부만추구하는 것이 인류의 종국적 사명은 아니다...부를 유일한 궁극적 목표로 하는 역사 궤도의 종착역으로서 사회의 해체가 우리를 위협하며 다가오고 있다...한층 높은 다음 단계의 사회...그것은 고대 씨족의 자유, 평등, 우애의 ― 한층 높은 형태의 ― 부활이 될 것이다.”

7. 생각해볼 것들 & 흥미로운 부분들

① 문명을 추동해온 것에 관하여

엥겔스는 ‘문명’의 첫 날부터 지금까지 개별적 부에 대한 탐욕이 문명을 추동해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지나치게 ‘단순한 가설’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관점이 문명사회를 극복할 제조건의 형성과 힘의 발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수천 년에 걸친 탐욕추구 과정의 자연스러운 부산물로? 다르게 말하면, 생산력 발전의 양면 중 발전된 생산력으로부터 인간의 소외라는 측면만 부각된 것은 아닌지.

② 친족관계에 상응하는 가족형태를 추적한 모건의 연구방법이 획기적인 이유

“가족은 능동적인 요소이다. 그것은...사회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함에 따라 낮은 형태에서 높은 형태로 전진한다. 반대로 친족 체계는 수동적이다. 그것은 가족이 시간과 함께 이룬 진보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기록하며, 가족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난 뒤에만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모건)

“그리고 정치, 법률, 종교, 철학 등의 각 체계에서도 사태는 일반적으로 이와 똑같다.”(맑스)

이 각각의 능동적인 요소에 대한 연구가 곧 유물론적 역사 연구. 그렇다면 각각의 시기에 이 ‘능동적인 요소’들은 생산력 및 생산방식과의 관계 속에서 정해지는 것?

③ 군혼에서 대우혼으로의 변화

“원시사에서 가족 발전의 요체는 양성간의 결혼 공동체가 지배하는 범위가 처음에는 부족 전체를 포괄하는 수준이었다가 지속적으로 좁아지는 데 있다. 처음에는 가까운 친족이, 다음에는 점차 먼 친족이, 그리고 급기야는 결혼으로 인척관계가 된 친족까지 배제됨으로써 결국 어떤 종류의 군혼도 실제로 불가능하게 되며, 종국에는 잠시 느슨하게 결합되는 한 쌍의 배우 관계[배우혼]만이 남게 된다.” 58p.

엥겔스는 군혼이 점점 더 불가능해지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여기서 “근친상간을 방지하려는 충동이 몇 번이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단 그것은 명확한 목적 의식 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암중 모색적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모건은 결과론적인 방식으로 “혈연 관계가 없는 씨족들 사이의 결혼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강력한 종족을 만들어낸다”고 하고, 엥겔스는 이를 자연도태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미개인들이 점차 친족 간 결혼을 기피하는 ‘관념’을 가지게 된 원인의 하나로 제시되는 것은 이 텍스트에서 이러한 ‘자연도태’에 대한 가설 뿐인데, 좀 더 자세하고 역사적이며 유물론적인 설명이 필요한게 아닌가 싶다.

또한 엥겔스는 군혼으로부터 단혼으로의 이행이 본질적으로 여성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무조건적으로 정당하다고 하면서, “경제적 생활조건들이 발전할수록, 그리하여 고대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인구 밀도가 증가함에 따라 예부터 내려오던 성관계가 태고의 소박한 성격을 잃게 될수록, 이 성관계는 여자들에게 더욱더 굴욕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여자들은 더욱더 절실하게 정조권...을 갈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경제적 조건들과 정서의 변화가 여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굴욕감을 가지게 하였는지.

이 밖에도 결정적인 전제나 추론에서 급관념적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가령 67p. 가부장이 된 남성이 종래의 상속순위를 파기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모권제의 파기가 추동되었다는 설명.

④ 현대적 의미의 가족형태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이유

“현대의 가족은 노예제 뿐만 아니라 농노제도 맹아 형태로 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농경을 위한 노력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가족은 그 후 사회와 그 국가에서 광범하게 발전한 온갖 대립들을 축소판의 형태로 내포하고 있다.”(맑스) 69p.

⑤ 일부일처제

“일부일처제는 결코 개인적 성애의 소산이 아니었으며, 그것과는 절대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왜냐하면 결혼은 변함없이 정략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는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즉 원시적인 자연 성장적 공동 소유에 대한 사적 소유의 승리에 기초한 최초의 가족 형태였다...그러므로 단혼은 남녀의 화해로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며, 더욱이 이화해의 최고 형태로서 나타난 것은 더욱더 아니다...그것은 한 성에 의한 다른 성의 예속으로서, 그때까지 선사 시대 전체를 통해서도 나타난 적이 없던 양성 간의 항쟁의 선언으로서 등장한 것이다...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 대립은 단혼에서의 남녀의 적대적 발전과 일치하고, 또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일치한다. 단혼은 위대한 역사적 진보였지만 동시에 그것은 노예제 및 사적 부와 함께,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저 시대, 모든 진보가 동시에 상대적 퇴보이며 한 사람의 행복과 발전이 다른 사람의 불행과 억압을 통해서 달성되는 그러한 시대를 열어놓았다. 단혼은 문명 사회의 세포 형태인바, 우리는 이것을 실마리로 해서도 문명 사회 속에서 완전히 전개되는 이 대립들과 모순들의 본성을 연구할 수 있다.”76-77p.

⑥ 프롤레타리아트와 개인적 성애

부르주아적 결혼: 당사자의 계급적 처지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정략 결혼. 극심한 매춘으로의 변모.

“아내와의 관계에서 성애가 진정한 규칙이 되고 또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피억압 계급들 사이에서뿐이다...그런데 이 계급에게서는 고전적 일부일처제의 기초[재산의 보존과 상속]도 모두 제거되어 있다...요컨대 프롤레타리아트의 결혼은 어원적 의미에서는 일부일처제지만 역사적 의미에서는 결코 일부일처제가 아니다.” 83p.

“성애는 그 본성상 배타적이기 때문에” 결혼의 완전한 자유가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완전한 의미의 일부일처제가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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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순덕한 호랭이 트랙백 0 : 댓글 1


1976. 2. 11 강의 발제문

 

트로이 신화

게르만적 가설

골족 중심 신화

불랭빌리에의 텍스트

시기

중세이래, 17c 중반

1573년~17c 초

17c~

17c 말~18c 초

줄거리

프리아모스 왕의 아들 프랑쿠스를 따라 트로이를 떠난 트로이인(프랑크족)들이 도나우강을 거쳐 라인강가에 정착, 이후 프랑스 창설.

베아투스 레나누스ver. 갈리아를 침략하여 골족과 싸워 이긴 것은 고향 땅 게르마니아를 떠난 게르만인 “프랑크족”. 따라서 프랑스는 정복과 승리의 권리에 의해, 동시에 게르만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합스부르크가 세계왕국에 종속되어야 함.

프랑수아 오트만 ver.

프랑스 왕국의 건설자는 로마인들을 물리친 게르만인.

골족과 프랑스 국가가 유럽의 다른 모든 나라의 모태. 4, 5c에 골을 침략한 프랑크족은 이 원시 골족의 후예들. 프랑크족은 깊은 노스탤지어+로마에 예속된 골을 해방시켜주려 갈리아에 온 것. but 로마화된 골에 흡수. 돌아오며 싸운 대상은 부르군디, 고트족(이교도들). 이 전사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왕이 봉토를 하사. (봉건제의 기원 설명)

가난한 귀족에게 불리한 매관제도 비난, 귀족의 사법권 및 연관된 이득 박탈 항의, 참사원의 자리 요구, 행정감독관들의 역할 비판. 특히 왕과 왕자에게 주어지는 정보가 행정조직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비판. ‘국가에 대한 국가의 정보’ 절대왕권과 이를 떠받치면서 순환적인 앎을 생산하는 행정조직 사이에 쐐기를 박고자 함.

특징

-로마와 골, 프랑크족의 침입을 완전히 삭제

-로마인=프랑크족

-로마제국 계승/로마제국과 동등한 왕국

-왕권=로마황제의 주권

-게르만족의 갈리아 침입, 정복 등장

-게르만=프랑크족=골족

-오트만ver.에서 골족이 아닌 로마인들을 물리친 것으로 변경->프랑스 왕의 로마식 명령권 부정

-프랑크 왕국의 헌법과 기본법은 게르만 사회의 기본법(민중주권)

-게르만적 가설을 피해가기 위해 채택된 수단의 하나

-골⊃게르만, 훈족, 영국인, 고트족...

-프랑크족=골족

-로마법=게르만법

-봉건제도의 기원을 왕의 의지로 설명

-세계왕국의 자격을 프랑스에게로 옮겨놓으려는 의도

* 이하 상술

트로이 신화(중세~르네상스 시기)-종교전쟁: 게르만적 가설(프랑수아 오트만, 1573-17c초)-트로이 신화로의 복귀/급진적 골중심주의(17c말)//17c말 불랭빌리에의 텍스트들

 

1. 공법 학습/교과서로서의 트로이 설화

 

중세 이후 통용되던 트로이 설화가 17c에 다시 복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설화가 담당했던 공법학습의 기능 때문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나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법을 말하고 있는 분명한 기능적 담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이야기의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① 로마인과 프랑크인의 기원의 공통성

 

로마인과 프랑크인이 한 형제(프리아모스의 아들들)로부터 기원했다면, 로마가 사라진 날부터 로마제국을 물려받는 것은 당연히 다른 형제들이다. 프랑스는 만인이 인정하는 일종의 자연권으로 로마제국을 계승한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왕이 국민들에 대하여 로마 황제가 자신의 신민에게 행사한 것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 왕의 주권은 로마 황제의 주권과 같다.

 

② 로마의 삭제

 

그러나 프랑스가 로마의 계승국인 것은 로마와 동등한 법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프랑스도 로마 제국의 다른 계승자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이므로, 게르만의 황제들(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에는 아무런 합법적인 가신관계가 없으므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품고 있던 세계왕국의 커다란 꿈에 예속될 이유가 없다. 로마가 삭제되어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③ 골족의 삭제와 프랑크족 침입의 삭제

 

골과 골족의 후예들(프랑크족)이 한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는 로마 시대의 골, 카이사르 시대의 골, 식민지 시대의 골 또한 완전히 삭제되어야 했다. 동시에 내적으로 로마 제국과의 연속성을 단절시킨 프랑크족의 침입 또한 삭제해야만 했다. 로마제국을 계승하면서(프랑스가 또 하나의 로마되기), 로마를 삭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합스부르크에 대한 불복종).

 

2. 종교전쟁

 

사람들은 이 낡은 신화(왕과 권력의 계보의 계속성을 보장하는)를 뒤엎고 두 개의 적대적인 집단이 국가의 영원한 하부구조라는 주제(이후 오귀스탱 티에리가 ‘민족이원성’이라 불렀던 주제)를 처음 도입한 것이 종교전쟁이었다고 말한다. 푸꼬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위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참조하는 프랑수아 오트만의 가설의 함의는 별개로 하더라도, 종교전쟁 당시의 그 어떤 저술가도 종족/민족의 이원성이 왕국을 관통하게 되리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종교의 신봉자들은 민족 내부의 이원성을 받아들이면서 종교의 단일성을 주장할 수 없었고, 종교의 선택가능성과 양심의 자유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사람들을 납득시키려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나라 안에서 두 종교의 존재는 그 어떤 경우에도 국가의 통일성을 해쳐서는 안된다...” 따라서 국가 통일성 가설은 종교전쟁 시기 내내 강화되었다.

 

3. 오트만 가설의 의의

 

① 공법교육이 불가능하게 된 계기

 

오트만의 가설은 침략을 통해 수많은 나라들이 사라지고 새로 생긴다는 가설이 영국에 나타나기 시작한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도입되었다. 이후 이 가설의 주변에서 모든 법률-정치적 논쟁이 한데 얽혀 나타났다. 이 근본적인 불연속성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왕과 그 권력의 계보의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공법교육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공법이라는 커다란 문제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계승할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문제로 바뀌었다. 국가가 확고한 연속성으로 계승되지 않고, 탄생과 강성, 쇠락, 완전소멸의 길을 걸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② 오트만의 문제의식-왕권의 내적경계를 확정짓기

 

오트만도 위에서 제기된 문제, 즉 한 국가 안에 이질적인 두 민족의 문제를 제기하기는 했다. 그러나 오트만은 역사를 말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왕국이 되살리고 싶어했던 로마식 절대권력에 대립하여 합법적 정부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다. 오트만의 문제는 그러니까 한 백성 안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두 요소의 분리가 아니라 왕권의 내적 경계를 확정짓는 것이었다. 그가 골족과 게르만족이 형제임을 피력하는 우화를 말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오트만의 역사기술은 독일과 프랑스, 프랑크와 골의 깊은 연대를 확립함으로써 역사의 형식을 빌려 현재를 두 겹으로 분리시켰다: 오늘날의 교황과 사제들(그 옛날의 로마 침략군)-라인강 저편의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 그룹(과거의 해방군이자 형제나라)

 

③ 오트만 담론의 중요성

 

왕과 국민의 상호 권리를 규정했으나 역사의 어느 순간에 잊혀지고 침해된 어떤 역사적 모델을 재발견하여, 그것을 절대왕권의 기획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오트만의 담론은 매우중요하다. 16세기 이래 왕권의 제한, 즉 과거 모델의 재구축과 잊혀진 기본법을 잇는 끈이 오트만의 담론 속에서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이원성 담론이 아니었다. 이 게르만적 가설은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유래하였으나, 가톨릭이 왕권의 제한에 관심을 가지고, 절대왕권 반대로 돌아섰을 때부터 가톨릭 그룹에까지 급속도로 퍼졌다.

 

4. 게르만적 요소를 피해가려는 노력들

 

17c 말부터 오트만 담론의 게르만적 요소를 피해가려는 작업이 착수되었다. 이것들이 공법의 원칙과 권력 행사의 측면에서, 리슐리외와 루이 14세의 유럽정책의 측면에서 왕권이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창설자가 게르만이라는 이 견해를 피해가기 위해 몇 가지 수단들이 채택되었는데, 그 중 특이한 두 가지가 17c 중반에 다시 활성화된 트로이 신화로의 회귀와 급진적인 ‘골중심주의’이다.

 

이 골중심주의적 우화들, 설화들은 종족의 차이를 지울 뿐 아니라 게르만 법과 로마 법의 이질성도 지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게르만인들이 그들 고유의 법을 버리고 로마인들의 법률-정치제도를 채택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봉토나 귀족의 특권도 귀족들의 고풍스롭고 근본적인 법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봉건제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권력과 절대권을 가지고 있었던 왕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골을 모든 유럽 민족의 모태로 삼음으로써, 세계왕국의 자격을 프랑스 쪽으로 옮겨놓고자 했다.

 

5. 침략, 역사, 공법

 

① 침략

 

17c 중반에 프랑스 왕조 창설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말했던 것과, 영국 왕조의 근원 및 창설에 대해 영국인들이 말하는 바에는 하나의 공통점과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침략의 형태와 동기, 결과가 역사적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들은 이제 중요한 법률-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자연과 법, 왕권의 제한을 말하는 것은 침략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왕의 참사원과 의회, 종심법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침략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귀족이 무엇이며, 왕과 왕의 참사원과 국민 앞에서 귀족의 권리는 무엇인가라는 말은 역시 침략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컨대 공법의 원칙을 세우자고 주장하는 것은 ‘침략’에 대해서이다.

 

② 역사

 

그로티우스와 푸펜도르프, 홉스가 자연법에서 정당한 국가를 구성하는 원칙을 찾으려 하고 있을 때, 그 반대편에서는 실제로 행사되는 법의 유효성과 근원에 대한 역사적 조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 프랑스의 역사를 통틀어 정치적, 법률적으로 가장 민감한 부분이 될 역사의 한 단면에 대한 것이었다. 대강 메로빙거 왕조에서 샤를마뉴 대제에 이르는 5세기에서 9세기 사이의 시대가 바로 그 대상이다. 그때까지 왕의 지배권의 영속성을 수립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프랑크족과 트로이의 역사만을 이야기하던 프랑스의 역사 지평 안에 새로운 인물들(메로베, 클로비스, 샤를 마르텔, 샤를마뉴, 페팽 등), 새로운 텍스트들(투르의 그레고리우스, 샤를마뉴의 텍스트), 새로운 문제들(샹드마르스, 5월 집회, 클로비스의 세레식, 푸아티에 전투, 샤를마뉴의 대관식, 수아송의 항아리 등)이 등장했다.

 

③ 공법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적 풍경과 새로운 참조대상을 제시한다. 이것들은 이 새로운 자료와 공법에 관한 정치적 논의 사이에 매우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사실상 역사와 공법은 나란히 진행된다. 18c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역사교육을 어떻게 하는가를 눈여겨본다면, 거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공법임을 발견할 수 있다.

 

④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점

 

군주제의 문제 주변에서 침략이라는 주제가 다시 활성화되던 시기의 영국에서 일어난 일과 거의 흡사한 새로운 역사의 장이 프랑스에 나타났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데, 영국에서는 노르만족과 색슨족의 종족적 이원성과 정복이 역사의 기본적 조음절인 반면, 프랑스에서는 17c 말까지 민족의 이질성이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골과 트로이, 골과 게르만, 골과 로마 사이의 신화적 인척관계는 권력 승계의 연속성과 민족의 동질성을 확실하게 보장해주었다. 그런데 17세기 말에 이 견고한 동질성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추가적이고 상이한 신화적 이론의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기능이나 목표나 결과에 있어 완전히 새로운 한 담론에 의해서였다.

 

6. 민족의 이원성

 

민족의 이원성이라는 주제를 도입하게끔 한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었다. ‘적대적인 집단들간의 전쟁이 실질적으로 국가의 하부구조를 형성하는가’, ‘정치권력이 생산물이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심판관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정치권력은 전쟁의 도구나 수혜자, 불균형을 야기시키는 요소인가’를 알기 위한 문제들. 이 문제에서부터 사회체의 동질성이라는 암묵적인 주제가 깨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은 군주가 무엇을 알아야 할까, 그의 지식을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얻어야 할까 등의 소위 정치교육의 문제에서부터였다.

 

7. 불랭빌리에의 텍스트들

 

① 비판 및 공격의 목표

 

불랭빌리에를 포함하여 반동적 귀족계급과 연결된 모든 역사학자들의 진정한 공격목표는, 17c 이래 국가 절대주의와 행정조직을 연결하는 이 앎 권력의 메커니즘이었다. 재산을 탕진하고 부분적으로 권력 행사에서도 밀려난 귀족계급이 탈환해야 하는 것은 잃어버린 부나 직접적 권력이 아니라, 그들 계급이 권력의 정점에 있었을 때에도 소홀히 했던 권력체계의 중요한 고리, 즉 왕의 앎, 왕과 귀족들이 공유하는 어떤 앎, 암암리의 법, 왕과 귀족의 상호 약속이었다. 결국 대항적인 앎 또는 완전히 새로운 역사연구의 형태를 띤 하나의 작업이 필요했다.

 

② 새로운 앎과 그 적들

 

ⅰ 법률적 앎

 

귀족들의 소유권을 박탈하는 앎, 앎에서 앎으로 이어지는 순환적인 앎(왕이 자신의 절대권력의 이미지만을 발견하는 앎).

 

↔ 역사: 공법의 뿌리, 역사적 공정성의 근거, 법의 역사(배신, 배신에 대한 배신들의 역사)를 부각시키는 앎. 배신당하고 모욕당한 귀족들의 무기가 될 앎. 문서의 뒤에서 암호를 해독하고 폐지된 것들을 다시 기억해내고, 사법적인 앎이 감추고 있는 분명한 적대성을 고발하는 앎.

 

ⅱ 행정감독관의 앎

 

집무실의 앎, 귀족의 권한과 부를 좀먹는 앎, 경제적/수량적인 앎, 잠정적 부, 부담가능한 조세에 대한 앎

 

↔ 부의 역사: 실제적인 부는 왕과 부르주아지에 의해 자행된 부도덕한 행위들의 혼합임을 보여주기 위해 부의 생산이라는 문제의 뒤로 돌아가보는 역사, 국왕의 금고가 귀족들의 소득을 삭감한 과정의 역사(부의 이동, 수탈, 빼돌리기, 빈곤화, 파산의 역사).

 

8. 새로운 앎, 새로운 역사

 

이제까지 역사는 권력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역사, 권력에 의한 권력의 역사였다. 이제 귀족들이 말하려고 하는 역사는, 역사적 앎의 기능 자체를 폭파시켜버릴 담론이었다. 그것은 역사기술과 권력행사 및 의식에 의한 권력 강화와 공법의 이미지화 양편의 상호연결성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불랭빌리에와 함께 역사의 새로운 주제가 나타났다.

 

① 새로운 이야기 주체/주제sujet

 

이제까지 역사의 화자이자 주인공 역할을 독점해온 권력의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등장한다. 역사를 말하는 사람이며 역사의 대상인 이 새로운 역사의 주체이자 주제는 당시 한 역사학자가 ‘사회’라 부른 것이다. 이 때 사회는 하나의 신분에 의해 결집된 개인들의 총체, 집단, 연합 또는 고유의 관습, 풍습, 자기들만의 일정한 법칙을 가진 일정수의 개인들로 구성된 집단이다(=민족). 민족은 국경, 한정된 권력체계, 국가가 없다. 이제부터 역사에서 문제가 되고 발언할 수 있는 것은 민족들이다. 민족혁명의 개념, 종족, 계급 개념도 모두 여기에서 연원한다.

 

② 새로운 형태의 앎

 

역사의 새로운 주제와 함께 이제까지 완전히 무시되었던 대상들에 대한 앎이 표면에 떠올랐다. 그것은 집단간의 연합과 경쟁, 은폐되었거나 드러난 이해관계의 역사이고, 지출과 수탈, 부채, 기만, 불이행 등의 역사이다. 이 앎의 방법은 조직적으로 망각된 모든 것을 회상하고 그 악의적 의도를 판독해 내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 안에 있던 악을 영원히 고발하는 방법이다.

 

푸꼬는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자신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권력의 주변에서 어떻게 특정의 투쟁도구가 권력 안에서 권력에 대항하여 생성되는지 하는 것이었고, 그 도구가 바로 이 새로운 형태의 앎이었다고 말한다. 이후로 한 정치집단이 이런저런 이유로 행정군주제의 절대국가 속에서 앎과 구너력의 결합을 비난하고자 할 때마다, 이런 유형의 담론이 많은 수정과 형식의 갈등을 일으키며 널리 유포될 것이었다.

 

③ 새로운 앎에 대한 포섭

 

18세기에 정치적 갈등이 역사적 담론으로 표출되던 시절, 또는 더 정확히 말해 역사적 앎이 절대왕정의 행정적 앎에 대항하는 정치적 무기였을 때 왕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앎을 재식민화하려 했다. 역사를 담당하는 행정부서의 창설(1760)은, 왕국의 법적 근거를 파괴할 수도 있는 역사적 자료가 있다는 것을 왕이 처음으로 암묵적으로 시인한 것이고, 결국 왕의 커다란 양보였다. 즉 왕의 권력과 행정권 사이에 헌법이나 기본권, 인민의 대표성 같은 어떤 것이 끼어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시인한 왕권의 첫 번째 양보였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절대권력에 대항하여 요긴하게 쓰려던 바로 그 자리에 이 역사적 앎을 권위주의적 형태로 다시 뿌리박는 것이기도 했다. 이 앎은 군주의 권력과 행정권의 행사 및 지식 사이에 있는 군주의 앎을 다시 소유하기 위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군주의 앎과 행정부의 지식 사이에 창설된 역사 담당부서는, 왕과 그 행정부 사이에 엄격히 통제된 방식으로 왕조의 단절 없는 전통을 수립해야 했다.

 

푸꼬는 이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또한 이 요소 안에서 민족간의 투쟁, 다시 말해 먼 훗날 인종과 계급의 투쟁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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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순덕한 호랭이 트랙백 0 : 댓글 0

예외상태 3, 4장 발제

2010/12/19 19:33 from 세미나

3. 유스티티움 Iustitium

3.1 유스티티움

근대 ‘예외상태’의 원형으로 간주될 수 있음.

법 자체의 효력정지/법률적 공백의 생산.

공화국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상황을 인지할 경우,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집정권, 치안관, 호민관들에게, 극단적인 경우에는 모든 시민에게 국가의 안녕을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모든 수단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이 원로원 권고는 로마에 동란(대외전쟁이나 봉기, 내전으로 야기된 비상상황)이 일어났음을 선언하고 통상 유스티티움 선포로 이어지도록 하는 법령에 기반해 있다.

3.2 테오도르 몸젠의 유스티티움 해석-『로마법 논고』

원로원 최종 권고와 그것의 전제인 긴급상태를 ‘정당 방위권’에 기대어 설명.

긴급상태가 법 바깥에 있음을 수긍하면서도 이를 이론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 원로원 최종 권고를 ‘준독재’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유스티티움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오도한다. 유스티티움의 경우, 어떠한 새로운 정무관직도 창출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시민이 정상적인 질서의 용어로는 정의될 수 없는, 유동적이고 이례적인 최고 명령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3.3 아돌프 니센의 분석-『유스티티움-로마 법제사적 관점에서의 한 연구』

니센은 유스스티티움을 통상 ‘휴정 기간’이라고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공적 추도’라는 후대의 의미와도 엄밀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했다. 니센에 따르면 유스티티움은 예외상태에 직면해 법률이 정무관들의 행동에 부과하고 있던 여러 제약들(특히, 로마 시민을 인민의 명령 없이 죽음으로 내모는 일의 금지)이 해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법의 정지, 법의 무효화이다. 법을 무효화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니센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스티티움이란 마키아벨리가 『리비우스 논고』에서 질서를 구하기 위해 질서를 ‘파괴하자’면서 아무런 주저함 없이 외쳤던 긴급 사태에 대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니센은 긴급사태를를, 원로원 최종권고, 동란의 선언과 체계적으로 연관지어 해석할 수 있었다. 원로원 최종 권고는 동란을 전제하며, 동란은 유스티티움의 유일한 원인이다. 이것들은 공법상의 범주이며, “공법상으로 보자면 예외적인 조치들이 현실화되기 시작하는 휴지기”를 가리킨다.

* 원로원 ‘최종’ultimus 권고-최종적인 긴급사태는 그 곳을 넘어서면 되돌아오가너 구해오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저편의 지대를 가리킨다. 그처럼 극한적인 상황에서 원로원 최종 권고는 무엇에 대해 극한적인가? 법질서에 대해. 이런 의미에서 원로원의 최종 권고와 유스티티움은 로마의 국법 질서의 경계를 표시한다.

3.4 니센으로부터 도출한 유스티티움의 본질적 특징들-유스티티움≠독재

로마 국법에서 독재관은 집정관들이 선출하는 특수한 종류의 정무관직으로, 쿠리아법을 통해 광범위한 최고 명령권을 부여받는다. 반면 유스티티움에서는 새로운 정무 기구가 창출되지 않고, ‘법률에 의해 공포됨 없이’ 무제한적인 권한을 향유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몸젠과 플라우만은 ‘준독재’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애매함을 전혀 없애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제도에 대한 그릇된 해석에 일조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근대의 예외상태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예외상태와 독재를 혼동함으로써 1921년의 슈미트,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로시터나 프리디리히도 예외상태라는 아포리아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런 오류는 특정한 이해관계와 관련이 있다. 즉 예외상태를 법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독재라는 권위있는 전통속에 예외상태를 기입하는 것이 용이하다는 사정이 그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외상태는 독재 모델에 따른 권력의 절정 상태가 아니라 법이 텅 빈 상태, 즉 법의 공백과 정지로 정의된다.

3.5 유스티티움 기간에 이루어진 행위의 성질

로마 전체를 갑자기 집어삼키는 이러한 아노미적 공간은 너무나 특이해서 고대의 문헌 자체를 혼란시킨다. 리비우스는 유스티티움 상황에서 집정관들이 민간인 상태로 되돌아갔다고 주장하고, 키케로는 스키피오 나시카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살해함으로써, 민간인이면서도 “마치 집정관인 것처럼” 행동했다고 적었다. 유스티티움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존립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공법과 최고명령권, 궁극적으로 법률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역설적 합치는 다음의 문제를 사유하는 것이 얼마나 곤란한지를 드러내준다: 유스티티움 기간에 이루어지는 행위의 성질이라는 문제.

이는 유스티티움 기간에 이루어진 행위가 법적 공백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모든 법률적 규정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만 명확해질 수 있다. 법의 관점에서는 얼마든지 인간의 행동을 입법, 집행, 법 위반 행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유스티티움 기간에 행동하는 정무관이나 민간인은 하나의 법을 집행하거나 위반하는 것도, 법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아노미 상태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행동에 어떻게든 이름을 부여하고 싶다면-그저 법을 집행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행동은 단순한 사실일 뿐, 법률적으로 절대 규정할 수 없으며, 그것의 본질을 정의하는 일은 법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3.6 유스티티움의 계보학적 연구 결과

1) 예외상태는 독재가 아니라 법의 공백 공간이며, 모든 법적 규정-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 자체가-작동하지 않는 아노미 지대이다. 따라서 예외상태를 법에 직간접적으로 연결시키려 했던 지금까지의 모든 학설은 틀렸다.

2) 법의 공백 공간은 몇 가지 이유들로 법질서에 매우 본질적인 것이므로, 법질서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예외상태와의 관계를 확고하게 해야만 한다. 마치 법질서가 확립되려면 반드시 아노미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처럼.

3) 법의 효력정지와 관련해 결정적인 문제는 유스티티움 기간에 이루어져 모든 법적 규정을 벗어난 행위의 본질 문제이다. 이 행위는 법의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의 절대적인 비-장소에 자리하는 듯하다.

4) 법률-의-힘이라는 생각은 이런 정의 불가능성, 비-장소에 대응하는 것이다. 법률에서 분리된 법률-의-힘, 부유하는 최고 명령권, 적용 없는 효력, 일종의 법률의 영도라는 생각까지 이 모두는 법이 스스로의 부재를 자체 안에 끌어안아 예외상태를 점유하기 위한, 혹은 적어고 그것과의 관계를 확보해두기 위한 픽션들이다. 법이 아노미를 둘러싸고 전개해온 긴 싸움에서 이들 범주가 당당했던 기능을 분석하는 것은 가능하고 또 유익하다. 이들 범주에서 중요한 것은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정의이다. 예외상태론의 본질적 임무는 예외상태가 법적 성질을 갖는지 아닌지를 분명히 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외상태와 법의 관계가 갖는 의미, 장소, 양태를 정의하는 것이다.

4. 공백을 둘러싼 거인족의 싸움

4.1 이런 관점에서 예외상태를 둘러싸고 발터 벤야민과 칼 슈미트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읽어보자. 1925~1956년 사이에 다양한 형태와 강도로 전개된 이 논쟁과 관련해 겉으로 드러난 관련 문서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문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데, 이 문서들의 맨 앞에는 벤야민의 『정치신학』독해가 아니라 벤야민의 「폭력비판론」(1921)에 대한 슈미트의 독해가 들어가야 한다.

슈미트의 주권론에 대한 벤야민의 관심은 언제나 스캔들로 간주되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스캔들을 뒤집어 슈미트의 주권론이 벤야민의 폭력 비판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살펴보겠다.

4.2 「폭력비판론」

완전히 법 ‘바깥에’ 그리고 법 ‘저편에’ 자리하면서 그 자체로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의 변증법을 폭발시켜버릴 수 있는 폭력violenza의 가능성을 확증하는 것이 벤야민 에세이의 목표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폭력을 ‘순수한’, ‘신적인’ 폭력이라 불렀으며 인간의 영역에서는 ‘혁명적’ 폭력이라 불렀다.

법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 법이 위협으로 느끼지만 절대 그것에 굴복해서는 안되는 것은 바로 법 바깥에 폭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런 폭력이 “그저 법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다. 벤야민의 비판은 그러한 폭력의 존립을 증명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폭력이 순수하고 직접적인 폭력으로서 법 바깥에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이로부터 혁명적 폭력이 가능하다는 것과 또 어떤 식으로 그것이 가능한지도 증명된다. 이 혁명적 폭력은 인간에 의해 순수한 폭력이 최고의 상태로 드러났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이 폭력에 고유한 본질적 특징은 법을 만들어내지도 보존하지도 않으며 단지 법을 탈정립시켜 새로운 역사시대를 연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이 에세이에서 예외상태를 거론하지 않는다. 하지만 슈미트가 사용하는 다른 전문 용어가 등장하는데, 결정이 그것이다. 법은 “장소와 시간에 의해 규정된 ‘결정’을 형이상학적 범주로 인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인정은 “모든 법적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결정 불가능하다는 데 대한 특이하고 매우 힘 빠지는 경험”에 대응하는 것일 뿐이다.

4.3 『정치 신학』

슈미트가 『정치 신학』에서 발전시킨 주권론은 여러 면에서 벤야민의 이 에세이에 대한 꼼꼼한 응답으로 읽을 수 있다. 벤야민과 반대로 슈미트는 순수하고 아노미적인 폭력을 법적 맥락 속으로 되돌려놓으려 한다. 슈미트에게 예외상태란 순수한 폭력이라는 벤야민의 생각을 포획할 수 있는 공간이자, 아노미를 저 노모스의 총체에 기입하려 할 때 설정하는 공간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순수한 폭력, 즉 완전히 법 바깥에 있는 폭력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외상태 속에서 그런 폭력은 바로 배제를 통해 법 안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예외상태란 하나의 장치, 벤야민이 주장한 완전히 아노미적인 인간 행위에 슈미트가 응답하기 위한 장치였던 셈이다.

두 글 사이의 관계는 훨씬 더 긴밀하다.

1) 슈미트는 제헌 권력과 헌법 권력 사이의 구분을 폐기하고 이를 결정 개념으로 대체하였다. 이러한 대체의 전략적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벤야민의 비판에 대한 응수로 바라보아야 한다.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 사이의 구분은 실제로 슈미트의 대립 도식과 문자 그대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슈미트가 주권론을 발전시킨 것은 제헌 권력과 헌법 권력 사이의 변증법을 벗어나 있는 순수한 폭력이라는 이처럼 새로운 형상을 무효화하기 위해서였다.

2)『정치 신학』에서 주권 권력은 법을 만들어내거나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효력정지시키는 벤야민의 순수한 폭력에 대응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법적 문제의 궁극적 결정 불가능성이라는 벤야민의 사유에 응답하여 슈미트는 주권을 극한적 결정의 장소로 파악한다. 이 장소는 법의 외부도 내부도 아니며, 이런 의미에서 주권은 ‘한계 개념’인데, 이는 순수한 폭력을 무효화하고 아노미와 법적 맥락 사이의 관계를 확실히 하고자 했던 슈미트의 시도에서 비롯된 필연적 귀결이다.

3) 벤야민이 결정을 통해서는 절대로 순수한 폭력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슈미트도 어던 경우가 실제로 긴급 상황인지, 그런 경우에 어떤 조치들이 실제로 취해져야 하는지를 내용면에서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슈미트는 이를 전략적으로 뒤집어 그러한 불가능성이야말로 거꾸로 주권적 결정이 절실하게 필요한 근거라고 주장했던 셈이다.

4.4 『독일 비애극의 원천』- 슈미트의 주권론에 대한 벤야민의 응답

벤야민은 주권에 대한 슈미트의 정의를 인용하면서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수정을 가한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크적 주권 개념은 “예외상태를 둘러싼 논의에서 발전한 것이며, 예외상태를 ‘배제하는 것’을 군주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삼고 있다.”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주권자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것을 법질서 안에 포섭해서는 안된다. 그는 예외상태를 배제해야 하며, 법질서 바깥에 남겨두어야 한다.

슈미트에게 결정이 주권과 예외상태를 결합하는 연결점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벤야민은 역설적이게도 주권자의 권력을 그것의 집행에서 분리시키며, 바로크의 주권자가 구성상 결정 불가능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배 권력과 지배 능력 사이의 대조...전제군주에게 결정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주권 권력과 그것의 집행 사이의 분리는 정확히 법 규범과 법 실현 규범 사이의 분리와 일치하는데, 『독재』에서 이러한 분리는 위임 독재의 토대였다. 『정치 신학』에서 슈미트는 결정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제헌 권력과 헌법 권력 사이의 변증법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에 대응했고, 다시 이에 대해 벤야민은 슈미트가 규범과 그것의 집행을 구분한 것을 끄집어내 응수한다. 항상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해야 하는 주권자는 법 전체를 분열시키는 단층이 복구 불가능하게 되는 장 그 자체인 것이다. 권력과 능력 사이에는, 또한 권력과 그것의 집행 사이에는 어떤 결정으로도 메꿀 수 없는 하나의 틈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예외상태는 『정치 신학』에서와 달리 기적이 아니라 파국이 되기에 이른다. 바로크는 시간의 종말을 알고 있다. 이 시간의 종말은 공백일 뿐이며, 구원도 피안도 모른 채 이 세상에 내재할 따름이다. “피안에는 가장 희미한 현세의 숨결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것이 비워져 있다. 바로크는 형상화를 벗어나기 십상이었던 사물들의 풍요로움을 피안으로부터 탈취해 그것을 지상에서 강렬한 형태의 최정점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최후의 하늘을 일소하고 진공 상태가 된 이 최후의 하늘이 언젠가는 파국적인 위력을 발휘해 지상을 파멸시킬 수 있는 그런 상태로 만들어놓는다.”

이러한 ‘하얀 종말론’은 바로크적 예외상태를 파국으로 형상화하고 슈미트가 정치적, 신학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주권과 초월, 군주와 신 사이의 일치를 분쇄한다. 벤야민에게 주권자는 “여전히 피조물의 영역에 갇혀 있을 뿐이며 피조물의 지배자라 하더라도 그 자신은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주권자의 기능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재정의는 예외상태가 초래할 완전히 다른 상황을 함축한다. 이제 예외상태는 아노미와 법적 맥락 사이의 절합을 보증하는 문턱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오히려 아노미인지 법인지 절대로 결정할 수 없는 지대가 되며, 그러한 지대 안에서 법질서와 피조물의 영역은 하나의 동일한 파국 속에 빠져들어가게 된다.

4.5 「역사철학테제」- 여덟 번째 테제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예외상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역사 개념에 도달해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실제적 예외상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반파쇼 투쟁에서의 우리의 입지가 향상될 것이다.”

슈미트의 관점에서 법질서의 기능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치, 즉 예외상태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것의 목적은 규범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킴으로써 규범을 적용가능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외가 상례까 되면 이 기계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저 여덟 번째 테제에서 정식화된 규범과 예외 사이의 결정 불가능성은 슈미트를 외통수로 모는 것이었다. 주권자의 결정은 『정치 신학』에서 부여된 임무를 더 이상 집행할 수 없다. 그런데 예외와 상례의 혼동은 제3제국에서 실제로 존재했다. 히틀러가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지 않은 채 집요하게 자신의 ‘이중 국가’를 조직하려 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벤야민이 여덟 번째 테제에서 하고 있는 실제적 예외상태와 예외상태 일반 사이의 구분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슈미트는 법률로 규제되는 예외상태(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예외상태)를 픽션적이라고 명명했다. 벤야민은 이 두 예외 상태 사이의 대립을 슈미트에게 되묻기 위해 그 대립을 다시 한번 정식화한다. 예외와 정상상황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구분되는 픽션적 예외상태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져버린 지금 절대로 상례와 구분될 수 없는 예외상태가 실제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폭력과 법을 연결해주던 모든 픽션은 여기서 사라진다. 남는 것은 아노미 지대 뿐이며 거기서는 어떤 법률적 가면도 쓰지 않은 폭력이 지배한다. 예외상태를 통해 아노미를 붙잡아두려는 국가 권력의 시도였던 법적 픽션을 대신해 내전과 혁명적 폭력, 즉 법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 행위가 들어선다.

4.6 벤야민-슈미트 논쟁의 결정적 논점

벤야민과 슈미트 사이의 논쟁은 한쪽에게는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법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다른 한쪽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한 관계를 끊고 벗어나야 하는 아노미 지대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지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폭력과 법 사이의 관계이다. 폭력을 다시 법적 맥락에 기입하려는 슈미트의 시도에 벤야민은 폭력이 순수한 폭력으로서 항상 법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논증하는 것으로 응수하고 있는 셈이다.

아노미를 둘러싼 싸움은 서양 형이상학을 규정해온 ‘존재를 둘러싼 거인족의 싸움’만큼이나 서양의 정치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정치의 궁극적 대상으로서의 순수한 폭력-정치의 고유한 대상인 순수 존재의 대응. 순수존재를 로고스의 그물망에 포섭하려는 존재[론]적, 신학적, 논리[학]적 전략에는 아노미적 폭력과 법 사이의 관계를 보증해야 하는 예외의 전략이 대응하고 있다.

따라서 법과 로고스가 생명의 세계에 가닿을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효력정지라는 아노미적(혹은 무논리[학]적)지대가 필요한 것인 양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다. 법은 아노미를, 언어는 비언어적인 것을 포섭해야 존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갈등은 하나의 텅 빈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아노미, 즉 법의 진공상태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규정이나 실재적인 술어도 결여한 순수존재. 법에 있어 이 텅 빈 공간은 그것의 구성적 차원으로서의 예외상태이다. 이 지대-규범과 무관하게 인간이 행동하는 지대-는 법의 극한적이고 유령적인 형상과 일치하며, 거기서 법은 적용 없는 순수한 효력(법률-의-형식)과 효력 없는 순수한 적용, 즉 법률-의-힘으로 분리된다.

법을 만들어내지도 보존하지도 않는 인간 행동인 순수한 폭력은 언젠가 포획되어 법적 맥락 속에 기입되어야 할 인간 행위의 어떤 원초적 형태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오직 예외상태를 둘러싼 싸움에서 핵심적ㅇ니 문제가 되는 것으로, 바로 이 싸움으로부터만 비롯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이런 식으로만 법보다 앞선 것으로 전-제된다.

4.7 순수한 폭력의 의미

“어딘가에 자체적으로 존재해 단지 보존하기만 하면 되는 순수성 따위를 전제하는 것은 오류입니다.……어떤 존재의 순수성은 결코 무조건적이거나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어떤 조건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조건은 순수성이 문제가 되고 있는 존재에 따라 다양할 것입니다.”

벤야민에게서 ‘순수성’은 관계적이다. 따라서 ‘순수한 폭력’의 순수성은 폭력 행위 자체에 내재하는 실체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 순수한 폭력과 신화적 ․ 법적 폭력 사이의 차이는 폭력 자체가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에서 유래한다. 벤야민은 이 외부의 조건이 무엇인지 글의 첫머리에서 확실히 하고 있다. “폭력이 법 및 정의와 맺고 있는 관계”

신화적 ․ 법적 폭력이 언제나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인 반면 순수한 폭력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 하나의 주제가 나타난다. ‘순수한 수단’, 즉 ‘목적없는 수단’이라는 역설적 형상으로서의 폭력이다. 따라서 문제는 정당한 목적을 식별해내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폭력은 목적에 따라 정당하거나 부당한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목적들에 대해 수단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관계하는 다른 종류의 폭력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수단은 목적과 다른 종류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언어가 전달이라는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순수하고 단순한 전달 가능성이 될 때 순수하듯이 폭력 또한 하나의 목적을 향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수단성과의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순수한 것이 된다 즉 오로지 폭력과 법 사이의 관계를 폭로하고 폐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법 정립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 결코 법과의 고유한 관계를 폐기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법을 “필연적이고 밀접하게 폭력과 연루된” 채로 남아있는 권력의 권좌에 올려놓는 반면 순수한 폭력은 법과 폭력의 연결망을 폭로하고 절단하며,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통치하거나 집행하는 폭력이 아니라 순수하게 작동하고 현현하는 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

4.8 계급 없는 사회의 법

“열쇠를 잃어버린 경전은 경전이 아니라 삶”이라는 말도,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궁리되는 법이야말로 정의로 가는 문”이라는 말도 이러한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열쇠를 잃은 경전은 예외상태에서의 법에 대한 암호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이런 법률은 더 이상 법률이 아니라 삶이다.

순수한 폭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신화적 ․ 법적 폭력의 폭로에는 카프카론에서 일조의 잔향으로 등장하는 이미지, 즉 더 이상 집행되지 않고 궁리되는 법이라는 수수께끼같은 이미지가 대응한다. 따라서 폭력과 권력 사이의 연결망이 절단된 후에도 여전히 가능한 법의 형상이 있다. 효력을 발휘하지도 적용되지도 않는 법이 그것이다.

그런 식으로 일체의 관계에서 해방된 뒤에도 살아남는 법은 어떤 것일까? 벤야민이 여기서 마주친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는 원시 기독교적/마르크스주의적 문제에 대응한다. 메시아의 완성 이후 법은 어떻게 되는가? 계급 없는 사회에서 법은 어떻게 되는가? 벤야민은 카프카의 「신임 변호사」에 대한 독해를 통해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려 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목적지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행국면이나 법을 유령적 삶 속에 유지시키지만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무한한 해체과정이 아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더 이상 집행되지 않고 궁리되는 법이 정의가 아니라 단지 정의로 이끄는 문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정의에 이르는 길을 여는 것은 법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법에서 활력을 빼앗고 작동을 멈추게 하는 일-즉 법을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법률-의-힘이 저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카프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예외상태 속에서의 법의 이러한 유령적 형상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각자에 고유한 전략에 따라 법을 ‘궁리하고’ 법에서 활력을 빼앗고 법과 ‘놀려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 인류는 마치 어린 아이가 쓸모없는 물건들을 갖고 노는 것처럼 법을 갖고 놀 것이다. 이는 법을 경전에 따라 사용하는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용에서 법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이다. 법 이후에 발견되는 것은 법에 선행하는, 보다 적절하고 원래적인 사용 가치가 아니라 법 이후에만 태어날 수 있는 새로운 사용법이다. 이러한 해방이 바로 궁리나 놀이의 임무이다. 이러한 궁리하는 놀이는 정의에 이르는 통로에 다름 아닌데, 벤야민은 정의를 세계가 절대로 전유되거나 법질서화될 수 없는 선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런 세계의 상태로 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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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공간 L 불어세미나팀>

욥, 노예의 힘
안토니오 네그리

프랑스어 판 서문

나는 이미 아주 오래 전, 1982년 혹은 1983년에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감옥에서 지낸 지 4년 째가 되던 해였다. 바로 그 때 나는 레오빠르디에 대한 저작을 쓰고 있었다. 당시 나는 고통에 관한 새로운 것에 대해 작업하고 있었였다. 레오빠르디는 현상학과 시학을 동시에 표현했다. 욥은 하나의 <<선례>>였다. 내가 처해있던 상황은 실로 절망스러웠다. 정치적인 이유로 오래 전부터 감옥에 있었으며, 이곳에서 어떻게 나갈 수 있을 지 생각할 수 없었다. 저항을 위한 열쇠를 나는 고통에 관한 분석에서 찾고자 했다. 절대적인 권력 앞에서 나 스스로를 방어할 힘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고 나자, 감옥의 고통과 비참함을 머리 속에서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억압에 대한 하나의 독해, 즉 저항을 가능하게 하고 정치적 패배 그 자체를 권력에 대한 하나의 비판으로 해석하게 해주는 하나의 독해를 발전시키는 것이 문제였다. 감옥에서 나오자 1983년에 나는 추방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고통스러운 상태에 대한 해석은 나에게 저항의 본질적인 계기가 되었다. 욥에 대한 수십개의 독해가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악에 대한 신학적 질문에 응답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Si Deus est, unde malum? 악이 존재한다면, 신은 왜 악을 존재하게 했는가? Si malum est, cur Deus? 그런데 이는 이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방의 길을 구축할 것인가를 발견하는 것의 문제이다. 이것은 변신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다. 감옥과 추방으로부터의, 권력의 절대성으로부터의 해방. 역사적 이행-되돌릴 수 없는 한 시대의 끝을 파악하고 테러로 변형된 유토피아에 대한 악몽을 설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정치적 패배로부터의 해방. 해방의 추구하면서 욥의 길을 따르는 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레오빠르디로 인해 그것은 훨씬 더 쉬워졌다. 전적인 낭만주의자로서 레오빠르디는 아이러니에 대한 뛰어난 감각(다시 말해 정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비판하는 능력)과 사유를 실천으로 옮기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사유와 실천은 시로 해방되었다. 나는 서로 다른 시기에 이루어진 레오빠르디의 활동에서,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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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 프랑스어 세미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JOB, LA FORCE DE L'ESCLAVE  (1) 201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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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 25 연구공간 L 기본소득 세미나 발제: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222-231p.쎄르지오 볼로냐, 안토니오 네그리 외 지음, 이원영 편역, 갈무리, 1997>


'포드주의‘의 위기에 직면하여:사회적 이행을 둘러싼 이탈리아의 논쟁


스티브 라이트




70년대의 보장 소득


보장소득 개념은 이탈리아 자율주의 담론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68년의 노동자 학생 봉기 이후에 사회적 임금 혹은 정치적 임금은 후에 아우또노미아의 주요한 인물들을 배출하게 될 노동자주의 그룹 ‘노동자의 힘’의 중심주제였다. 노동자의 힘은 현대의 계급 갈등을 직접적 생산과정 내부에서의 투쟁으로 이해하였으며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발견되는 숙련과 명령의 위계에 도전하면서 소득을 생산성과 연계시키는 것(노동거부의 전략)으로부터 풀어내고자 했다. 이 노동거부는 사회적 부의 더 큰 부분을 전유하려는 투쟁에서 긍정적으로 표현되고 조직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적 임금을 위한 투쟁은 수행된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서 임금을 협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회적 임금은 또한 임금노동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요구되었다. 국가의 극빈계층 구제책이 더 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특권화했던 나라에서, 정치적 임금은 부불노동에 대한 단순한 보상 이상이었다. 즉 그것은 지불과 생산성 사이의 괴리를 더욱 심화시키면서 자본의 위기를 가속시킬 수 있었다.


사회적 서비스들의 인상가격을 ‘자율인하’ 하고 소비와 재상산의 다양한 수단들을 장악하고자 한 대중캠페인에 고무되어 70중반에서 말에 이르기까지 아우또노미아의 지배적 조류들은 직접적 전유의 그러한 사례들에 정치적 설명을 부여하는 것에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네그리 또한 사회적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통해 임금 문제를 생산과 재생산 영역 안에서의 사회적 부의 생산력들의 직접적 전유로서 분명히 재정식화하고자 했다.



고르를 넘어서? 재전유로서의 보장소득


지난 10여년간 보장소득에 관한 좌파들의 많은 논의는 앙드레 고르의 작품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1984년 고르의 저서 『노동자 계끕이여 잘 있거라』에 대한 서평에서 미드나잇 노트는, 임금 노동의 변수들 외부에서 구성된 생산적 활동의 새로운 영역에 대한 고르의 계획은 단지 ‘노동거부를 둘러싼 투쟁들을 선점하고 좌파를 노동자 계급의 매니저로 놓는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를 은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고르의 구상은 자유를 가져오기는 커녕 더 많은 부불노동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적대적인 반응과 달리, 이탈리아 북동부 자율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최근의 토론들은 고르를 취급함에 있어 좀더 신중하다. 예컨대 1995년 3월에 열린 지역회의에서 쓰여진 어떤 논문은, 대안적 생산부문에 대한 고르의 생각이 문자 그대로 취해져서는 안되지만, 그의 전망은 그것이 지닌 프루동주의적이고 후진적인 측면들에도 불구하고 얼마간의 진리의 요소들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보장소득에 대한 가장 상세한 자율주의적 평가라고 할 수 있는 글 속에서 까를로 빨레르모는 과거에 존재하던 기술과 노동 분업의 형식들을 파악할 수 없는 고르의 무능력을 거부하면서도, 소득의 문제가 노동시간의 ‘점차적인 그러나 급격한’ 축소와 나란히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는 그를 칭찬한다. 고르의 가장 큰 실패는 그것을 이행할 방법에 대한 현실적 방법의 결여와 자본에 의해 설치된 경계 내부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것에 기인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자율적 활동성’이라는 비임금적 세계와 ‘필연적’인 임금 영역 모두에 다리를 걸치고 서 있기 때문에 보장소득에 대한 고르의 생각은 결국 임금관계의 지배를 궁극적으로 깨뜨릴 어떠한 수단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씨모 데 안젤리스도 보장 소득이 자본관계에 도전하는 수단으로 복무하기 위해서는 노동일의 길이에 대한 공격과 연결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소득에 대한 접근을 노동시장 문제에서 분리시키는 많은 제안들은 실상 노동시장이 효과적으로 기능하게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기존 사회관계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는 모든 계획은 비참의 재분배를 수반할 뿐이다. 그는 보장 소득을 노동일의 단축과 연결시키는 것은 자본이 분할하려는 모든 것들 사이에, 즉 취업자와 실업자, 진일제 직원과 시간직/임시직 직원 사이에 투쟁을 유통시킬 효과적 수단을 제공할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빨레르모에 따르면 다음은 임금노동에 반대하면서 고르를 넘어서는 급진적 개혁주의 프로그램의 단초가 될 수 있다.


① 보장소득은 고르의 주장처럼 임노동을 수행하기 위한 권리/의무와 결합되어선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수행하기 위한 권리/의무와 결합되어야 한다.

② 자유시간의 해방은 오늘날 대의민주주의 형식들에 도전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행정기능의 재전유를 포함해야 한다.

③ 보장소득은 노동시간의 생태학적, 일반적, 평등주의적 단축을 수반해야 할 뿐 아니라 주거, 교육, 건강 등 모든 종류의 서비스와 사용가치의 자유로운 분배를 포함해야만 한다.

④ 이러한 사용가치 및 서비스의 보장과 발전은 생산의 사회적 목표에 있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며, 자율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적 노동과 협업의 확장에 기초하여 복지국가의 제도 및 서비스들을 재전유하는 과정의 동력이 되어야만 한다.

⑤ 이 시민소득 패키지는 궁극적으로 전지구적인 범위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빨레르모의 이러한 프로그램은 보장소득을 위한 요구를 필요노동의 축소를 향한, 그리고 자본관계와 국가의 해체를 향한 일보로서의 사회적 서비스의 재전유와 자주관리라는 목표에 연결짓는다. 이 논의에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보장소득이 그 시초에서부터 부분적으로는 사용가치로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빨레르모에 따르면 순수히 화폐적 술어로 정의된 소득은, 전통적 복지국가의 관료적 논리와 합치하면서 이것에 의해 위계적으로 통제되는 사회화 형식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그는 선택된 사회적 서비스의 자유로운 배분에 기초한 보장소득이, 필요가 이윤의 논리를 대체한 자율적 관리 부문의 더 한층 확장을 이룰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가 없는 사회화 전략의 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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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공간 L 기본소득학술대회 준비 세미나: 2010. 1. 8.  



<지금! 보장된 기본소득> 발제문 

칼 라이터, 2004

1.생산양식의 변화

1.1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 공장의 사회로의 용해,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을 분리하는 경계의 소멸, 임노동 및 취업노동의 중심성 해체로 특징지어지는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양식과 사회적 관계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엄청난 곤궁함으로 몰아넣지만(새로운 불안정 노동형태들의 도입을 통한 단체협약적 규정들의 무력화+포드주의적 부문에서 자본의 공격의 강화), 다른 한편에서 기본소득의 정당화 맥락에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그것은 포스트포드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취업노동의 상대화를 몸소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며, 삶의 계획 가능성이 축소되고 취업노동의 불안정성이 심화됨에 따라, 각자 자신의 노동과 소득을 조직하기 위해 노동 그 이상의 유형의 필요성을, 즉 일종의 메타노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또 이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살고 살아남을 수 있기 위하여 본래의 취업노동과 나란히 그 외의 노동이 필수적인 것이다. 보장된 기본소득은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경험에 조응하여, 모든 활동을 사회적으로 중요한 노동으로 인정하는 것, 포스트포드주의적 삶의 조건들의 엄청난 불확실성을 제한하는 것, 더 많은 자유의 공간들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1.2취업노동 및 임노동을 넘어서는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필요: 일상적으로 수행되는 노동의 극히 작은 부분만이 취업노동 및 임노동으로 수행되며 이는 포스트포드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경험된다. 매우 확장된 노동개념에 기반한 이론들(예컨대 네그리 하트의 제국, 다중, 존 홀러웨이의 ‘행위의 흐름’ 개념 등)이 강하게 수용된다는 사실은, 임노동과 취업노동이 결코 우리 활동의 중요하고 충분한 형태가 아니라는 경험에 대한 중요한 징후이다. 그런데 이러한 취업노동 및 임노동의 중심성 해체 경향에 대한 경험에 더하여 취업노동 및 임노동을 상대화시키는 적극적인 의지적 행위, 개입이 필요하다.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바로 이러한 적극적 요구의 하나이며, 자본주의 사회 이후 사회의 궁극적인 권리의 상을 체현하고 있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 바로 이후를 예비하는,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유효한 이행기 전략이라고는 할 수 있다.

2.보장된 기본소득

2.1곤궁함이라는 기준의 폐지

2.2수입조사, 직업훈련강요 및 노동 요구 등의 개입없는 무조건적 보장소득

2.3기본소득의 본질적 목표로서의 자유

2.4소득과 취업노동을 분리함으로써, 그 전망과 해방의 잠재력에서 사회복지국가를 단지 방어하거나 확장하려고 하는 모든 지향들보다 더 뛰어나다.

3.비판에 대한 반비판

3.1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자금조달)을 문제삼는 비판에 대하여: 기본소득 옹호자들 중에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기본소득의 재정필요에 대한 연구 혹은 계산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금조달가능성에 대한 참조가 정치적 의사표시 및 정치적 소망과의 충돌 앞에서 기피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완전고용 혹은 커리어와 같은 이른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회적 목표들에 돌파구를 만들기 때문에, 그리고 기본소득이 실행가능성의 강압과 실제적 강제들에 정치적 소망을 대립시키기 때문에 보장된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는 또한 본질적이다.

3.2기본소득이 트로이의 목마라는 비판에 대하여: 기본소득이 빈자들, 실업자들 등 정말로 전투적인 힘의 전체운동에 일종의 재정적 신경안정제로 이용될 우려가 있다는 비판.

3.3기본소득논의가 결국 사회복지의 해체를 받아들이려는 신자유주의적 계산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에 대하여: ‘사회복지예산’이 축소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곧장 ‘사회복지국가장치’의 쇠퇴로 연결될 수 없다. 이 국가장치는 빈자들에 대한 조사, 심문, 통제, 훈련, 교육 등 유래없는 개입을 통해 그들을 관리하며 다음과 같은 마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하에서 어떤 방식으로 제공되든 온갖 종류의 취업노동을 조건없이 수용하라” 즉 “그 어떤 노동이라도 무노동보다는 낫다”. 사회복지지출을 줄이려는 시도는 실업자들과 빈민구제수령자들에 대한 강화되고 가능한 한 정밀한 통제 및 조정과 제휴한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사회정책과 관련하여 결코 신자유주의적 시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역행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실현 불가능하더라도 모든 사회복지지출의 무조건성의 원리는 분명히 단언되어야 한다.

3.4기본소득이 국가와 화폐를 사회화의 본질적 요소로 받아들인다는 비판에 대하여: 이러한 비판을 단순히 유토피아적이라고 추방하기보다 문제제기의 출발점을 공유하므로 이러한 반대를 진지하게 다루겠다. 기본소득의 실현에 있어 국가는 단순한 행정 기구로 축소할 것이다. 기본소득의 이체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개입에 소용될 예산은 없을 것이다. 기본소득이 국가와 다르며 더 나은 정치가 아니라, 경제적 기본권의 보장을 청구한다는 것은 맞다.(이런 점에서 이행기적 전략으로서의 기본소득을 생각하는 듯)

두 번째, 화폐형태에 대하여. 기본소득이 근본적으로 화폐형태를 폐기하는데 이르지 못한다는 비판인데, 이 반대가 일관되게 밀어부쳐지면 일체의 임금인상, 사회복지지출, 재정지원 등에 대해 거부하게 된다. 화폐형태의 요구들을 포기하는 것은 경제적인 것의 장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함을 의미할 뿐이다.

더 정밀한 고찰에서 이러한 반대는 더욱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은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특성을 나타내는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 상품을 문제시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바로 자신의 노동력 이상의 것을, 즉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으로 성취된 권리를 가진다. 이것이 상품천민이라는 상품지위 자체를 훼손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임노동을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임노동을 상대화하며 임노동의 혹독함을 완화시킨다. 기본소득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만큼 한층 더 많이 임노동에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문을 열어젖힌다.


□ 라이터는 계속해서 소련과 중국 등의 역사적 사회주의 국가의 이데올로그들과 정통 맑스주의가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의 개인의 소비와 분배 문제를 ‘정치적 결정’에 우위를 두는 방식으로 풀어왔다는 점을 비판한다. 엥겔스(계획과 가치법칙의 대립), 레닌(당이론을 통해 권력을 계급해방에 있어 중심적 문제로 가져옴), 스탈린으로 이어진 이러한 계보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계획 주체의 필요->전위당이 곧 계급을 대표->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당의 독재로의 귀결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 편에서 우리는 레닌이 혁명의 문제를 경제주의, 객관적 법칙의 전개가 아닌 정치적 결정의 문제로 가져온 데서 그 독특성을 찾는 견해들을 접해왔다. 레닌에 대한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커먼웰스 첫 시간부터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던, ‘정치적 결정’으로서의 혁명과 좀 더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생산지형에서의 운동에 밀착하여 사유되는 혁명 사이에 어떤 긴장관계를 라이터 또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라이터가 포스트포드주의로 명명한 오늘날에도, 이러한 구분을 받아들이고서 우리는 혁명을 사고해야 할까? ‘정치’가 주의주의적 행위로서가 아닌 그 자체로 경제와 떨어질 수 없는 ‘삶정치적 생산의 지형’이 되는 그 지점에 기본소득 문제가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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