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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무조건적 기본소득 세미나'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1/25 스티브 라이트, '포드주의'의 위기에 직면하여
  2. 2010/01/20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3. 2010/01/11 칼 라이터, <지금! 보장된 기본소득> 발제문

<2010. 1. 25 연구공간 L 기본소득 세미나 발제: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222-231p.쎄르지오 볼로냐, 안토니오 네그리 외 지음, 이원영 편역, 갈무리, 1997>


'포드주의‘의 위기에 직면하여:사회적 이행을 둘러싼 이탈리아의 논쟁


스티브 라이트




70년대의 보장 소득


보장소득 개념은 이탈리아 자율주의 담론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68년의 노동자 학생 봉기 이후에 사회적 임금 혹은 정치적 임금은 후에 아우또노미아의 주요한 인물들을 배출하게 될 노동자주의 그룹 ‘노동자의 힘’의 중심주제였다. 노동자의 힘은 현대의 계급 갈등을 직접적 생산과정 내부에서의 투쟁으로 이해하였으며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발견되는 숙련과 명령의 위계에 도전하면서 소득을 생산성과 연계시키는 것(노동거부의 전략)으로부터 풀어내고자 했다. 이 노동거부는 사회적 부의 더 큰 부분을 전유하려는 투쟁에서 긍정적으로 표현되고 조직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적 임금을 위한 투쟁은 수행된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서 임금을 협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회적 임금은 또한 임금노동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요구되었다. 국가의 극빈계층 구제책이 더 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특권화했던 나라에서, 정치적 임금은 부불노동에 대한 단순한 보상 이상이었다. 즉 그것은 지불과 생산성 사이의 괴리를 더욱 심화시키면서 자본의 위기를 가속시킬 수 있었다.


사회적 서비스들의 인상가격을 ‘자율인하’ 하고 소비와 재상산의 다양한 수단들을 장악하고자 한 대중캠페인에 고무되어 70중반에서 말에 이르기까지 아우또노미아의 지배적 조류들은 직접적 전유의 그러한 사례들에 정치적 설명을 부여하는 것에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네그리 또한 사회적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통해 임금 문제를 생산과 재생산 영역 안에서의 사회적 부의 생산력들의 직접적 전유로서 분명히 재정식화하고자 했다.



고르를 넘어서? 재전유로서의 보장소득


지난 10여년간 보장소득에 관한 좌파들의 많은 논의는 앙드레 고르의 작품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1984년 고르의 저서 『노동자 계끕이여 잘 있거라』에 대한 서평에서 미드나잇 노트는, 임금 노동의 변수들 외부에서 구성된 생산적 활동의 새로운 영역에 대한 고르의 계획은 단지 ‘노동거부를 둘러싼 투쟁들을 선점하고 좌파를 노동자 계급의 매니저로 놓는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를 은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고르의 구상은 자유를 가져오기는 커녕 더 많은 부불노동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적대적인 반응과 달리, 이탈리아 북동부 자율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최근의 토론들은 고르를 취급함에 있어 좀더 신중하다. 예컨대 1995년 3월에 열린 지역회의에서 쓰여진 어떤 논문은, 대안적 생산부문에 대한 고르의 생각이 문자 그대로 취해져서는 안되지만, 그의 전망은 그것이 지닌 프루동주의적이고 후진적인 측면들에도 불구하고 얼마간의 진리의 요소들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보장소득에 대한 가장 상세한 자율주의적 평가라고 할 수 있는 글 속에서 까를로 빨레르모는 과거에 존재하던 기술과 노동 분업의 형식들을 파악할 수 없는 고르의 무능력을 거부하면서도, 소득의 문제가 노동시간의 ‘점차적인 그러나 급격한’ 축소와 나란히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는 그를 칭찬한다. 고르의 가장 큰 실패는 그것을 이행할 방법에 대한 현실적 방법의 결여와 자본에 의해 설치된 경계 내부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것에 기인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자율적 활동성’이라는 비임금적 세계와 ‘필연적’인 임금 영역 모두에 다리를 걸치고 서 있기 때문에 보장소득에 대한 고르의 생각은 결국 임금관계의 지배를 궁극적으로 깨뜨릴 어떠한 수단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씨모 데 안젤리스도 보장 소득이 자본관계에 도전하는 수단으로 복무하기 위해서는 노동일의 길이에 대한 공격과 연결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소득에 대한 접근을 노동시장 문제에서 분리시키는 많은 제안들은 실상 노동시장이 효과적으로 기능하게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기존 사회관계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는 모든 계획은 비참의 재분배를 수반할 뿐이다. 그는 보장 소득을 노동일의 단축과 연결시키는 것은 자본이 분할하려는 모든 것들 사이에, 즉 취업자와 실업자, 진일제 직원과 시간직/임시직 직원 사이에 투쟁을 유통시킬 효과적 수단을 제공할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빨레르모에 따르면 다음은 임금노동에 반대하면서 고르를 넘어서는 급진적 개혁주의 프로그램의 단초가 될 수 있다.


① 보장소득은 고르의 주장처럼 임노동을 수행하기 위한 권리/의무와 결합되어선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수행하기 위한 권리/의무와 결합되어야 한다.

② 자유시간의 해방은 오늘날 대의민주주의 형식들에 도전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행정기능의 재전유를 포함해야 한다.

③ 보장소득은 노동시간의 생태학적, 일반적, 평등주의적 단축을 수반해야 할 뿐 아니라 주거, 교육, 건강 등 모든 종류의 서비스와 사용가치의 자유로운 분배를 포함해야만 한다.

④ 이러한 사용가치 및 서비스의 보장과 발전은 생산의 사회적 목표에 있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며, 자율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적 노동과 협업의 확장에 기초하여 복지국가의 제도 및 서비스들을 재전유하는 과정의 동력이 되어야만 한다.

⑤ 이 시민소득 패키지는 궁극적으로 전지구적인 범위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빨레르모의 이러한 프로그램은 보장소득을 위한 요구를 필요노동의 축소를 향한, 그리고 자본관계와 국가의 해체를 향한 일보로서의 사회적 서비스의 재전유와 자주관리라는 목표에 연결짓는다. 이 논의에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보장소득이 그 시초에서부터 부분적으로는 사용가치로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빨레르모에 따르면 순수히 화폐적 술어로 정의된 소득은, 전통적 복지국가의 관료적 논리와 합치하면서 이것에 의해 위계적으로 통제되는 사회화 형식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그는 선택된 사회적 서비스의 자유로운 배분에 기초한 보장소득이, 필요가 이윤의 논리를 대체한 자율적 관리 부문의 더 한층 확장을 이룰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가 없는 사회화 전략의 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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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공간 L 기본소득학술대회 준비 세미나: 2010. 1. 8.  



<지금! 보장된 기본소득> 발제문 

칼 라이터, 2004

1.생산양식의 변화

1.1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 공장의 사회로의 용해,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을 분리하는 경계의 소멸, 임노동 및 취업노동의 중심성 해체로 특징지어지는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양식과 사회적 관계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엄청난 곤궁함으로 몰아넣지만(새로운 불안정 노동형태들의 도입을 통한 단체협약적 규정들의 무력화+포드주의적 부문에서 자본의 공격의 강화), 다른 한편에서 기본소득의 정당화 맥락에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그것은 포스트포드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취업노동의 상대화를 몸소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며, 삶의 계획 가능성이 축소되고 취업노동의 불안정성이 심화됨에 따라, 각자 자신의 노동과 소득을 조직하기 위해 노동 그 이상의 유형의 필요성을, 즉 일종의 메타노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또 이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살고 살아남을 수 있기 위하여 본래의 취업노동과 나란히 그 외의 노동이 필수적인 것이다. 보장된 기본소득은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경험에 조응하여, 모든 활동을 사회적으로 중요한 노동으로 인정하는 것, 포스트포드주의적 삶의 조건들의 엄청난 불확실성을 제한하는 것, 더 많은 자유의 공간들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1.2취업노동 및 임노동을 넘어서는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필요: 일상적으로 수행되는 노동의 극히 작은 부분만이 취업노동 및 임노동으로 수행되며 이는 포스트포드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경험된다. 매우 확장된 노동개념에 기반한 이론들(예컨대 네그리 하트의 제국, 다중, 존 홀러웨이의 ‘행위의 흐름’ 개념 등)이 강하게 수용된다는 사실은, 임노동과 취업노동이 결코 우리 활동의 중요하고 충분한 형태가 아니라는 경험에 대한 중요한 징후이다. 그런데 이러한 취업노동 및 임노동의 중심성 해체 경향에 대한 경험에 더하여 취업노동 및 임노동을 상대화시키는 적극적인 의지적 행위, 개입이 필요하다.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바로 이러한 적극적 요구의 하나이며, 자본주의 사회 이후 사회의 궁극적인 권리의 상을 체현하고 있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 바로 이후를 예비하는,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유효한 이행기 전략이라고는 할 수 있다.

2.보장된 기본소득

2.1곤궁함이라는 기준의 폐지

2.2수입조사, 직업훈련강요 및 노동 요구 등의 개입없는 무조건적 보장소득

2.3기본소득의 본질적 목표로서의 자유

2.4소득과 취업노동을 분리함으로써, 그 전망과 해방의 잠재력에서 사회복지국가를 단지 방어하거나 확장하려고 하는 모든 지향들보다 더 뛰어나다.

3.비판에 대한 반비판

3.1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자금조달)을 문제삼는 비판에 대하여: 기본소득 옹호자들 중에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기본소득의 재정필요에 대한 연구 혹은 계산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금조달가능성에 대한 참조가 정치적 의사표시 및 정치적 소망과의 충돌 앞에서 기피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완전고용 혹은 커리어와 같은 이른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회적 목표들에 돌파구를 만들기 때문에, 그리고 기본소득이 실행가능성의 강압과 실제적 강제들에 정치적 소망을 대립시키기 때문에 보장된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는 또한 본질적이다.

3.2기본소득이 트로이의 목마라는 비판에 대하여: 기본소득이 빈자들, 실업자들 등 정말로 전투적인 힘의 전체운동에 일종의 재정적 신경안정제로 이용될 우려가 있다는 비판.

3.3기본소득논의가 결국 사회복지의 해체를 받아들이려는 신자유주의적 계산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에 대하여: ‘사회복지예산’이 축소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곧장 ‘사회복지국가장치’의 쇠퇴로 연결될 수 없다. 이 국가장치는 빈자들에 대한 조사, 심문, 통제, 훈련, 교육 등 유래없는 개입을 통해 그들을 관리하며 다음과 같은 마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하에서 어떤 방식으로 제공되든 온갖 종류의 취업노동을 조건없이 수용하라” 즉 “그 어떤 노동이라도 무노동보다는 낫다”. 사회복지지출을 줄이려는 시도는 실업자들과 빈민구제수령자들에 대한 강화되고 가능한 한 정밀한 통제 및 조정과 제휴한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사회정책과 관련하여 결코 신자유주의적 시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역행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실현 불가능하더라도 모든 사회복지지출의 무조건성의 원리는 분명히 단언되어야 한다.

3.4기본소득이 국가와 화폐를 사회화의 본질적 요소로 받아들인다는 비판에 대하여: 이러한 비판을 단순히 유토피아적이라고 추방하기보다 문제제기의 출발점을 공유하므로 이러한 반대를 진지하게 다루겠다. 기본소득의 실현에 있어 국가는 단순한 행정 기구로 축소할 것이다. 기본소득의 이체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개입에 소용될 예산은 없을 것이다. 기본소득이 국가와 다르며 더 나은 정치가 아니라, 경제적 기본권의 보장을 청구한다는 것은 맞다.(이런 점에서 이행기적 전략으로서의 기본소득을 생각하는 듯)

두 번째, 화폐형태에 대하여. 기본소득이 근본적으로 화폐형태를 폐기하는데 이르지 못한다는 비판인데, 이 반대가 일관되게 밀어부쳐지면 일체의 임금인상, 사회복지지출, 재정지원 등에 대해 거부하게 된다. 화폐형태의 요구들을 포기하는 것은 경제적인 것의 장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함을 의미할 뿐이다.

더 정밀한 고찰에서 이러한 반대는 더욱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은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특성을 나타내는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 상품을 문제시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바로 자신의 노동력 이상의 것을, 즉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으로 성취된 권리를 가진다. 이것이 상품천민이라는 상품지위 자체를 훼손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임노동을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임노동을 상대화하며 임노동의 혹독함을 완화시킨다. 기본소득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만큼 한층 더 많이 임노동에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문을 열어젖힌다.


□ 라이터는 계속해서 소련과 중국 등의 역사적 사회주의 국가의 이데올로그들과 정통 맑스주의가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의 개인의 소비와 분배 문제를 ‘정치적 결정’에 우위를 두는 방식으로 풀어왔다는 점을 비판한다. 엥겔스(계획과 가치법칙의 대립), 레닌(당이론을 통해 권력을 계급해방에 있어 중심적 문제로 가져옴), 스탈린으로 이어진 이러한 계보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계획 주체의 필요->전위당이 곧 계급을 대표->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당의 독재로의 귀결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 편에서 우리는 레닌이 혁명의 문제를 경제주의, 객관적 법칙의 전개가 아닌 정치적 결정의 문제로 가져온 데서 그 독특성을 찾는 견해들을 접해왔다. 레닌에 대한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커먼웰스 첫 시간부터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던, ‘정치적 결정’으로서의 혁명과 좀 더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생산지형에서의 운동에 밀착하여 사유되는 혁명 사이에 어떤 긴장관계를 라이터 또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라이터가 포스트포드주의로 명명한 오늘날에도, 이러한 구분을 받아들이고서 우리는 혁명을 사고해야 할까? ‘정치’가 주의주의적 행위로서가 아닌 그 자체로 경제와 떨어질 수 없는 ‘삶정치적 생산의 지형’이 되는 그 지점에 기본소득 문제가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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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순덕한 호랭이 트랙백 0 : 댓글 0